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시장방임주의를 신앙처럼 신봉하던 시절인 20세기 초에 유효수요이론(Theory of Effective Demand)을 들고 나와, 시장은 불완전하므로 그냥 내버려두면 총수요가 균형에서 이탈하여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반복된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즈는 자신의 학설을 주창하는 과정에서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축의 역설(Paradox of Savings)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1929년 10월24일) 하루 동안에만 미국 주가가 20% 넘게 폭락하고 세계 대공황이 진행되면서 실업률이 치솟자 미국인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소비를 최대한 줄이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늘린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는 당연해 보이는 이 행태가 불황을 심화시켜 결국에는 저축 여력을 오히려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일견 궤변처럼 들리는 이 주장에 대해 케인즈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절약하고 저축을 늘린다는 것은 경제 전체로 보았을 때 소비가 급격히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상황이 정상적이라면 소비가 줄어드는 대신 늘어난 저축이 투자로 연결되면서 경제 내의 총수요는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대공황과 같이 기업들의 투자심리가 얼어붙어 있을 때에는 저축이 아무리 늘어도 투자로 연결되지는 않고 저축된 돈 만큼 소비만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들의 매출이 더욱 감소하여 휴·폐업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실업률은 더욱 높아져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한층 저하됨에 따라 저축할 여력이 갈수록 소진된다는 논리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는 국민의 저축열이 높다는 특징이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에는 국민의 교육열과 더불어 높은 저축성향이 성장 동력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우리 경제의 지속 발전을 위해서는 건전한 저축을 통해 우리 스스로 성장 자본을 형성해 나가야 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저축의 역설에서 보여지듯, 합리적인 소비계획을 통해 저축이 형성되는 것과 불안심리로 인한 무조건적 절약으로 저축이 형성되는 것은 시장에 주는 신호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향후 경제가 내실있게 성장할 것이라는 신호를 주어 기업들이 저축된 돈을 투자로 연결시키면서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투자해서 생산을 늘려도 팔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저축이 투자로 연결되지 못하여 불황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저축에 앞서 빚을 내어 집과 자동차를 마련하고 평생 채무를 갚아 나가던 미국인들이 최근 수개월 사이에 대공항 이후 처음으로 3% 수준으로 급등한 저축성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반기기보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합리적인 소비가 이끌어 내는 투자 활성화는 작금의 불황 타개에도 도움이 되지만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제고하기 위해 더욱 긴요하다. 정부가 각종 투자 유인 정책과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 등을 통해 내수확대를 촉진하고 금융감독 당국이 직접 기업들의 금융 관련 애로사항을 현장 점검하고 지원하는 이유도 투자의 활성화야말로 경제회복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와 금융당국이 노력한다 하더라도 우리 경제를 구성하는 세포인 소비주체들이 모두 움츠러드는데 투자가 어찌 활성화되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대내외 여건이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말고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지속함으로써 소비와 투자 그리고 저축의 선순환구조를 구축하여 작금의 경제난국이 조속히 타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조기인 금융감독원 광주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