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은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심리학자다. 그는 1942∼45년에 유태인수용소를 전전하다 전 가족을 잃고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쓰고 로고세라피(logotherapy:의미치료)라는 심리치료 이론을 창시했다.
책에는 겪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잔혹과 고통이 지배하는 상황과 그 속에서의 행동양식이 기록되어 있다. 폭력과 협박에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것은 물론 일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막사에 남아 똥, 오줌에 절은 짚더미에 누워 몰래 담배를 피우는 체념자들, 간수들과 짜고 밀반입한 물건을 팔아 돈벌이에 열중하는 무리들, 완력과 간교로써 수용자들 사이에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자와 추종자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을 대신하여 먼저 죽음을 선택하는 신부, 자신은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배급된 빵을 남에게 주는 이도 있고, 도둑을 신고하는 대신 모든 수용자들이 한 끼의 식사를 포기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이런 다양한 행동양식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걸까? 프랭클은 이로부터 ‘의미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삶의 의미를 잃으면 절망하게 되고 죽음을 맞게 되지만 의미를 놓지 않으면 삶을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되어 다양하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비극 속에서 낙관을 유지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데, 그 방법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우리 농업·농촌의 현실은 죽음의 수용소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위기라고 하는 게 진실이다. 농산물의 수입은 늘고 생산비는 치솟는데 판매가격은 떨어져 소득은커녕 팔기도 어려운 일이 다반사다. 농업·농촌·농가 인구가 줄어 마을이 비어가면서 노인들만 늘고 있다. 몇 남지 않은 농촌의 젊은 층 가운데 40%는 노총각 신세를 면하려고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 신부를 구하고 있다. 소득과 교육·의료·복지 모든 면에서 농촌은 도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농업·농촌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농업·농촌에서 의미와 희망을 찾는 게 중요하다. 농업·농촌의 어려움보다는 위안과 가능성, 따라서 진실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는 말들이 오가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와 비교해서 우리 농업·농촌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도시와 상공업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어렵고 뒤떨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온갖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성공한 사례들이 소개되고, 때로는 과장되기도 한다. 농가들도 지자체도 저마다 활로를 찾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홍보와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도시에 비해 농촌이 갖는 장점, 다원적 기능, 도시민의 귀농·귀촌 의향 등을 토대로 농촌의 장밋빛 미래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우리 농업·농촌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원하고 바라는 게 무엇이며, 그것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는지,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성공사례와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경쟁력을 갖게 됨으로써 살아남은 소수의 사례들이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다수의 탈락자는, 그들의 고통과 눈물은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프랭클이 간과했던 핵심은 어떤 행동양식의 군상이든 혼자서, 남과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살아남았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협동·협력을 통해서 공포와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쓰촨성과 일본 코베 대지진 사태, 태안반도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등의 재해를 이겨내는 데 협력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여건이 어려울수록 서로 다투는 일이 많다. 그러나 다툰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우리 농업·농촌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서 찾는 게 어떨지….

/박석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