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12월 12일(목) 21:30 가가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는 매우 특이하게도 사찰 안에 성문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야트막한 동산을 오르면 얼마 안가 제법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바로 그 위에 홍예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성문이 서 있다. 생긴 것은 누가 봐도 성문이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성벽이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특이하다.
왜 이 자리에 사찰의 건축 양식과 아무런 상관없는 성문이 있을까? 속세의 번잡함에 잔뜩 주눅 든 일주문과 달리, 홍예문은 동산을 조금만 올라 가면 멀리서부터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낙산사를 방문하는 이들은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낙산사에 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눈에 성문 안 도성이 별천지로 느껴지듯, 홍예문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바닷가 야트막한 동산에 넓게 자리한 낙산사는 온 도량이 기도처이고 온 도량이 수행처이다. 이곳이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곳, 즉 출세간(出世間)이다. 홍예문은 세속을 떠나는 문이자,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성문으로 지은 이유가 저절로 수긍된다. 온갖 번뇌로 물든 속세로부터 수행도량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일찌기 나옹 스님은 이렇게 노래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내려놓고 탐욕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삶이 바람직한 삶이다. 마치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관망하기만 해서는 제 밥그릇 챙기기도 힘들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속세를 떠나거나, 속세에 살더라도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한다. 나옹 스님이 권하는 올바른 처세술은 “말없이, 티없이, 성냄도 탐욕도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은 주인 된 자의 삶이 아니라 나그네 같은 삶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러나 팍팍한 이 사바세계에서 내 삶의 나그네가 되어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먹통이 되어버린 컴퓨터를 고치려고 시내에 나갔다. 지하철 공사 때문에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한참을 보냈다. 서비스센터에 도착해서는 접수하고 순서를 기다리느라 또 한참을 기다렸다. 거의 두어 시간을 허비한 끝에 겨우 얻은 대답은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는 것이 전부였다. 피곤과 허탈 그리고 짜증이 겹쳤지만 어쩌랴 싶어 돌아오는데 시간은 벌써 5시를 훌쩍 넘겨 버렸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더니 비어 있는 넓은 자리들이 많은데도 굳이 비좁은 1인용 테이블에 앉으라고 강권한다. 다시 또 짜증이 올라오지만 역시 참았다. 나이 어린 알바생이 무슨 죄랴 싶었다.
나는 “말없이,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어도 주변에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중생이 나옹 스님의 당부대로 일상을 꾸려 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 지경이다.
기도하고 예불하며, 낙산사에서 1박2일 동안 머물렀다. 지내는 내내 “말없이, 티없이 그리고 맑고 깨끗하게” 지내고자 노력했다.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지내려 하였다. 내 안의 성냄과 탐욕도 잠시나마 힘을 잃은 듯했다. 낙산사에서의 1박2일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옹 스님의 속내가 조금은 가슴에 와닿는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은 제 못난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나의 게으름을 언제까지 남 탓, 세상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평생을 남 탓만 하고 산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서 낙산사 같은 기도처가 이 사바세계의 한가운데 있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허우적거리다가도 낙산사 같은 빼어난 도량에서 하룻밤 기도하면 잠시나마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내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소유물의 주인이 되고자 함도 아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내 소유물이 내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잠시 빌려 씀을 의미한다.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과 나란히,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관세음보살님은 낙산사 원통보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가 곧 나의 수행처요 나의 기도처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나옹 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다.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눈에 성문 안 도성이 별천지로 느껴지듯, 홍예문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바닷가 야트막한 동산에 넓게 자리한 낙산사는 온 도량이 기도처이고 온 도량이 수행처이다. 이곳이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곳, 즉 출세간(出世間)이다. 홍예문은 세속을 떠나는 문이자,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성문으로 지은 이유가 저절로 수긍된다. 온갖 번뇌로 물든 속세로부터 수행도량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팍팍한 이 사바세계에서 내 삶의 나그네가 되어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먹통이 되어버린 컴퓨터를 고치려고 시내에 나갔다. 지하철 공사 때문에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한참을 보냈다. 서비스센터에 도착해서는 접수하고 순서를 기다리느라 또 한참을 기다렸다. 거의 두어 시간을 허비한 끝에 겨우 얻은 대답은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는 것이 전부였다. 피곤과 허탈 그리고 짜증이 겹쳤지만 어쩌랴 싶어 돌아오는데 시간은 벌써 5시를 훌쩍 넘겨 버렸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갔더니 비어 있는 넓은 자리들이 많은데도 굳이 비좁은 1인용 테이블에 앉으라고 강권한다. 다시 또 짜증이 올라오지만 역시 참았다. 나이 어린 알바생이 무슨 죄랴 싶었다.
나는 “말없이,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 “물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어도 주변에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중생이 나옹 스님의 당부대로 일상을 꾸려 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 지경이다.
기도하고 예불하며, 낙산사에서 1박2일 동안 머물렀다. 지내는 내내 “말없이, 티없이 그리고 맑고 깨끗하게” 지내고자 노력했다.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지내려 하였다. 내 안의 성냄과 탐욕도 잠시나마 힘을 잃은 듯했다. 낙산사에서의 1박2일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옹 스님의 속내가 조금은 가슴에 와닿는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은 제 못난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나의 게으름을 언제까지 남 탓, 세상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평생을 남 탓만 하고 산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서 낙산사 같은 기도처가 이 사바세계의 한가운데 있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허우적거리다가도 낙산사 같은 빼어난 도량에서 하룻밤 기도하면 잠시나마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내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소유물의 주인이 되고자 함도 아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내 소유물이 내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잠시 빌려 씀을 의미한다.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들과 나란히,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관세음보살님은 낙산사 원통보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가 곧 나의 수행처요 나의 기도처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나옹 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