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마주하는 법-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10월 18일(금) 06:00 가가
며칠 전까지 하루 종일 불탄 공양간의 폐허를 바라보며 살았다. 시꺼멓게 불탄 대들보와 서까래, 파편이 되어 흩어진 기왓장들, 휘고 일그러져 본래 형체를 알 수 없는 조리 설비들. 화재 현장이었던 그곳은 언제부터인가 공양간의 죽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김장 울력, 동지 울력… 폐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에서 꽃피웠던 많은 이들의 시간과 추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가장 일본적인 주제로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일본 열도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비롯, 실제로 재난이 발생했던 지역들을 다시 기억에서 소환시키고 있다.
극중 ‘쇼타’는 ‘토지사’이다. 토지사는 지진이 형상화된 에너지 덩어리인 미미즈를 뒷문 저 편으로 돌려보내고 뒷문을 잠그는 일을 한다. 미미즈를 가두는 것은 미미즈가 빠져나왔다면 생겼을 지진을 막는 것과 같다. 토지사는 이 세계에 벌어졌을지도 모를 엄청난 재앙을 막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편으로 토지사의 이런 행위는 폐허에 대한 천도의식이기도 하다. 폐허란 지진, 쓰나미, 산사태, 홍수, 태풍, 화재, 전쟁, 대형참사, 사람들의 무관심 등으로 죽음을 맞이한 건물들로 황폐해진 터를 일컫는다. 풍경에 쓰이는 묘사로 건물들의 죽음이 표현되는 것은 인간에게 건물은 삶의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허는 단순하게 건물들의 죽음만은 아니다. 그 건물들이 살아 숨쉬던 동안, 건물들과 함께 했던 인간들의 기억과 감정과 온기까지 폐허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폐허처럼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일까 토지사가 미미즈를 봉인하려면 그 건물들과 시공을 함께 한 사람들의 마음과 오롯하게 공명해야만 한다. 그래야 열쇠 구멍이 나타나고, 토지사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열쇠를 꽃아 뒷문을 잠글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영혼을 추모하는 의식을 치른다. 산 자들이 죽은 이에게 치르는 장례의식이다. 산 자의 배웅으로 죽은 이는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천도의식은 죽은 이를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산 자들의 의식이다.
풀이나 나무는 죽어서도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자 그 자체가 자연이다. 살았건 죽었건 다르지 않다. 그저 모습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를 죽여서 지은 집과 바위를 녹이고 모래를 갈아 만든 자동차는 더이상 자연이 아니다. 자연에서 가져온 것은 자연으로 돌려줄 때에도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든다. 그들이 인간에게 한낱 쓰레기더미나 폐허에 불과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그들을 제대로 추모하지 못한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가져왔으니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 역시 인간의 몫이다. 인간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에게 와 건물이 되었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산 자가 죽은 이에게 치르는 천도의식이 그러하고, 토지사가 치르는 뒷문 봉인이 그러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에 이른 건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건물들 역시 처음 왔던 곳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면 살아있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건물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표현을 쓰자면 인간의 손길로 만들어진 것이다. 건물은 인간을 품고 인간과 함께 생을 이어왔다. 인간의 부재는 건물에게 곧 죽음과도 같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은 인간의 세계에 두고,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떠나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온기와 감정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다. 건물들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정작 추모하고 기리고 품어야 할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다만 폐허의 겉모습만 본다. 폐허가 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폐허에 대한 추모는 폐허의 기억과 공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자연은 자연에게 되돌리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다. 그것이 건물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식이다.
공양간 건물을 지탱하던 기둥과 대들보, 시원한 풍경을 선물하던 넓은 유리창, 많은 이들의 한끼 식사를 책임지던 조리대…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함께 한 동안 받은 행복에 감사하며, 이런 모습으로 보내려니 가슴 찢어지는 아픔조차 차마 송구할 뿐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다시 보았다. 재난과 마주하는 법을 가르쳐 준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극중 ‘쇼타’는 ‘토지사’이다. 토지사는 지진이 형상화된 에너지 덩어리인 미미즈를 뒷문 저 편으로 돌려보내고 뒷문을 잠그는 일을 한다. 미미즈를 가두는 것은 미미즈가 빠져나왔다면 생겼을 지진을 막는 것과 같다. 토지사는 이 세계에 벌어졌을지도 모를 엄청난 재앙을 막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풀이나 나무는 죽어서도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자 그 자체가 자연이다. 살았건 죽었건 다르지 않다. 그저 모습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를 죽여서 지은 집과 바위를 녹이고 모래를 갈아 만든 자동차는 더이상 자연이 아니다. 자연에서 가져온 것은 자연으로 돌려줄 때에도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든다. 그들이 인간에게 한낱 쓰레기더미나 폐허에 불과하다면, 이는 전적으로 그들을 제대로 추모하지 못한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가져왔으니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 역시 인간의 몫이다. 인간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에게 와 건물이 되었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산 자가 죽은 이에게 치르는 천도의식이 그러하고, 토지사가 치르는 뒷문 봉인이 그러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에 이른 건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건물들 역시 처음 왔던 곳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려면 살아있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건물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표현을 쓰자면 인간의 손길로 만들어진 것이다. 건물은 인간을 품고 인간과 함께 생을 이어왔다. 인간의 부재는 건물에게 곧 죽음과도 같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은 인간의 세계에 두고,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떠나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온기와 감정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에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다. 건물들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정작 추모하고 기리고 품어야 할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다만 폐허의 겉모습만 본다. 폐허가 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폐허에 대한 추모는 폐허의 기억과 공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자연은 자연에게 되돌리는 것이 인간이 할 일이다. 그것이 건물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식이다.
공양간 건물을 지탱하던 기둥과 대들보, 시원한 풍경을 선물하던 넓은 유리창, 많은 이들의 한끼 식사를 책임지던 조리대… 이 모든 것들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 한다. 함께 한 동안 받은 행복에 감사하며, 이런 모습으로 보내려니 가슴 찢어지는 아픔조차 차마 송구할 뿐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다시 보았다. 재난과 마주하는 법을 가르쳐 준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