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기쁨을 회복하자 -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4년 09월 13일(금) 07:00 가가
지난 9월 2일부터 4일까지 ‘다니엘 기도회’로 유명한 오륜교회에서 전국의 목회자 오백 명을 초청해 2박 3일 일정으로 목회자 리조이스(Paster’s Rejoice in the Oryun)를 진행하였다. 나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많은 목회자들이 감사와 기쁨을 누린 것에 대하여 후기들을 끊임없이 올리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인사말을 전하기 위해 올라온 준비위원장 장로님의 말씀 속에 그간 수개월의 정성어린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목회자들에게 무엇을 해드려야 기뻐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전한 말이 웃음을 선사했는데 ‘무엇을 좋아 하실지 몰라 이것저것 다양하게 준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목회자인 나는 왜 기쁨을 잃어 버렸을까? ‘지금 내 상황에서 기뻐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다. 힘들어하고 우울한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라며 스스로를 어두운 동굴로 파고들지 않았나 싶다. 나는 군복무를 시작한 20대 초반에 군종병으로 군인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30여 년 가까이 교역자로 지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그 일을 감당했다. 40대 초반 젊은 나이에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어떤 면에서는 호기롭게 담임목회를 시작하였지만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위암 판정을 받고 전절제 수술을 하여 위 전체를 들어내었다. 그리고 코로나 상황 가운데 시무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홀로 외롭게 개척을 하였다. 위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웠고 개척 후 일 년이 지나는 동안 코로나로 아무도 찾아오지도, 전도는 물론이고 온전한 예배를 진행할 수도 없었다. 점점 우울함은 더해가고 좌절감이 엄습했다.
가끔은 즐겁기도 하고 기쁜 일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구멍 난 타이어에 바람을 넣었다가 금세 빠져서 꺼져버리는 것이었다. 개척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예배인원이 수십 명으로 늘어 성장하고 발전한 것 같은데 그것으로 인하여 즐겁거나 기쁨이 샘솟지는 않았다.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말씀은 그렇게도 자주 인용하여 성도들에게 기쁨을 강조해놓고 나 스스로는 그렇지 못한 것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목사지만 신앙인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기쁨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었던 것에 스스로 놀랐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분이 즐거움이나 기쁨을 표현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분의 기쁨이 우리(내) 안에 있어 기쁨을 충만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으면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기쁨’의 헬라어 ‘카라’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여성명사형 단어이다. 다른 이의 생각, 말, 행위 등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을 줄 때 사용하는 단어다.
금번 목회자 리조이스를 통해 환대와 사랑을 받으며 주님의 사랑과 깊은 은혜를 받았다. 그분들의 친절한 말과 기쁨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속에서 기쁨이 다시 샘솟는 듯했다. 순간순간 즐거움의 환호와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찬양을 부르며 가슴은 뭉클해졌고 주님의 따스한 품에 안긴 듯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회복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였던 그 기쁨이 가득한데서부터 시작된다. 따뜻한 목욕탕 속에 들어가면 전신의 긴장이 풀어지고 시원함을 느끼듯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곳으로 부르는 초청을 거절하지 말고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나와 같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다시 회복하고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애초부터 기쁨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었던 것에 스스로 놀랐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분이 즐거움이나 기쁨을 표현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분의 기쁨이 우리(내) 안에 있어 기쁨을 충만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으면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기쁨’의 헬라어 ‘카라’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여성명사형 단어이다. 다른 이의 생각, 말, 행위 등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을 줄 때 사용하는 단어다.
금번 목회자 리조이스를 통해 환대와 사랑을 받으며 주님의 사랑과 깊은 은혜를 받았다. 그분들의 친절한 말과 기쁨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속에서 기쁨이 다시 샘솟는 듯했다. 순간순간 즐거움의 환호와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찬양을 부르며 가슴은 뭉클해졌고 주님의 따스한 품에 안긴 듯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회복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였던 그 기쁨이 가득한데서부터 시작된다. 따뜻한 목욕탕 속에 들어가면 전신의 긴장이 풀어지고 시원함을 느끼듯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곳으로 부르는 초청을 거절하지 말고 그 기쁨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나와 같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다시 회복하고 충만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