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자리에서는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09월 06일(금) 00:00 가가
상식에 벗어나고 예의가 없으며 쏟아내는 말이 저급하고 폭력적이며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참 버릇없고 어리석어!’라고 속으로 되뇌인다. 혹여 엮이고 싶지 않으려는지 밖으로 소리 내 ‘참 버릇없고 어리석네!’라고 내뱉지 못하지만, 이미 속내는 거리를 둔다. 왜냐하면 위험이 도사리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을 선택해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오염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방어기제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상식과 예의 없고 저급하고 폭력적이긴 하지만 무슨 이득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끔 내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소유와 욕심 그리고 탐욕으로 이어지는 강한 유혹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되지!’라며 자기반성 작용을 통해 유혹을 뿌리친다.
정의롭게 사는 것, 깨끗하게 부정 없이 사는 것, 예의를 갖추면서 강하지만 부드럽고 상대를 품어주려고 한다. 이런 이유는 ‘나’ 또한 그렇게 대해주어야 하는 소중한 존재이며, ‘너’라는 타자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대하면 그렇게 똑같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신약성경 갈라티아서 6장 7절의 말씀인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이다”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사자성어도 떠오른다.
어릴 적, 고향 집 논에 모내기를 하고 물을 대는 집안 어르신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땅은 거짓이 없어야!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 땅은 하는 만큼 돌려준다니까!” 생명과 희망의 말이었고, 노력의 대가는 절대 삶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었다.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작금의 세상은 얍삽하고 잔머리를 굴리며 비겁하고 이기적이어야만 살아남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매사의 삶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이런 삶은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삶이라고 조소하며 비웃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불의와 비리는 창피함도 없이 저지르고 악취가 진동하는 끝없는 탐욕의 광기를 부리는 이들은 천박한 자본주의를 논리와 객관을 들먹이며 합리화한다. 이러한 광기는 이기적인 집단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 개인에게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합리화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별도 없이 우리의 기초적인 질서까지 무너뜨리는 악의 속삭임이다. 처음부터 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시대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이렇게까지 어리석게 되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어떨 때 어리석어지는지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한 이기심이 작용할 때, 소유하려는 욕심이 강하여 탐욕을 부릴 때 어리석어진다. 극한 이기심과 탐욕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극한 이기심과 탐욕은 우리가 약속했던 가장 기본적인 질서마저도 쉽게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래서 악취가 진동하고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죽더라도 그저 자신을 위해서만 걸어가기에,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전혀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최근 우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되뇌이는 지도 모르겠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 존재의 약함을 자랑하였다. 진정한 힘과 변화는 자신의 약함에서 드러나고, 자신이 목숨을 다해 전하려 했던 예수의 구원과 사랑은 작고 약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코린토 전서 1장 25절에서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작은 것에서부터 정의롭게 진실하게 선하게 그리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럼 작금의 세상에 한숨보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떨 때 어리석어지는지 궁금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한 이기심이 작용할 때, 소유하려는 욕심이 강하여 탐욕을 부릴 때 어리석어진다. 극한 이기심과 탐욕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극한 이기심과 탐욕은 우리가 약속했던 가장 기본적인 질서마저도 쉽게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래서 악취가 진동하고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죽더라도 그저 자신을 위해서만 걸어가기에,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전혀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최근 우리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되뇌이는 지도 모르겠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 존재의 약함을 자랑하였다. 진정한 힘과 변화는 자신의 약함에서 드러나고, 자신이 목숨을 다해 전하려 했던 예수의 구원과 사랑은 작고 약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코린토 전서 1장 25절에서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작은 것에서부터 정의롭게 진실하게 선하게 그리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럼 작금의 세상에 한숨보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