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춘, 김동수 열사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5월 30일(목) 22:00 가가
요즘 들어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모든 열사들은 영원한 청춘(靑春)이다. 푸르른 봄이라… 그 이름만으로도 싱그럽고 아름답다. 그들은 활짝 피어오른 절정의 순간에 멈추어 있다. 활짝 핀 꽃처럼 싱그러운 젊음을 가득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젊음이 담고 있는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얼굴은 환하기만 하다. 오히려 살아남은 이들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해지는 것은 열사가 미처 누리지 못한 삶까지 대신 살기 때문이다. 그 삶의 무게에 짓눌려, 머리는 하얗게 탈색되고 얼굴은 쭈글쭈글해지고 급기야 검버섯까지 핀다. 그렇게 세월은 열사들을 비켜간다.
1980년 당시 조선대 전자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동수 열사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장직을 맡아 불교학생회를 이끌었고, 광주지역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의 부위원장도 맡았다. 5월, 계엄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전남도청 항쟁지도부에서 학생 수습 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4시 30분께 계엄군 총탄에 맞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숨졌다.
열사의 고향 마을은 풍요로운 들판과 듬직한 야산을 품고 있다. 열사는 고향마을에서 자연의 넉넉한 포용력을 보고 배우며 성장하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비심을 실천하는 보살의 길로 나아갔으리라. 하지만 어머니같은 자비심도 계엄군의 총탄은 피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무자비한 것이 인간의 역사이자 중생심이다.
광주에서 제법 떨어진 장성 시골에서 치룬 행사임에도 젊은 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일전에 진모영 감독은 나를 만나, 열사의 생가에 오래된 창고가 비어서 열사의 기념관으로 할까 한다는 계획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래서 올해는 열사의 마을에서 조촐하게 열사를 추모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런데 주최측의 예상과 다르게 엄청난 인파가 찾아왔다.
나고 자란 고향 마을로 돌아와서일까? 추모문화제에서 만난 김동수 열사는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무성한 이파리로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마을 어귀 정자 나무 아래에 조촐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열사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씻김굿이 이어진다. 열사를 태운 반야용선이 넘실넘실 하얀 바다를 건너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옆에 앉아 계신 열사의 어머니가 혼자 넋두리하듯 조용히 말한다. “잘가거라.”
영원한 청춘을 사는 것은 열사만이 아니다. 김준태 시인은 광주를 일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라고 하였다. 그날의 광주 역시 열사들처럼 흐르는 세월을 비켜 홀로 우뚝 서 있다.
광주는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서 영원한 청춘이라는 천형을 받고 있다. 당장 나부터도 이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조금은 더 즐겁고 조금은 더 축제처럼 광주의 정신을 기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날 것의 고통을 굳이 매번 마주해야 할까 의문스러웠다.
고통스럽고 암울했던 과거는 털어버리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숙성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이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할 뿐이다. 역사 속 광주는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영원한 청춘의 도시이다.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춘을 살고 있는 열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열정으로 불태우고 있다.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그때, 처음으로 전태일 열사를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나도 그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지금도 썬팅된 차창으로 내리쬐던 칙칙하고도 나른했던 햇살의 기억이 생생하다.
평소 친분 있는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젊은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길래, “열사의 삶을 지표로 삼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젊은 청년 전태일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지금도 여전하다. 다만 게으른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오늘의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젊은 학생들 역시 김동수 열사를 마음 속 깊이 새겨, 평생 지니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면 언젠가 그 어떤 날 삶이 힘들 때, 해맑은 얼굴로 불쑥 열사가 그대들을 반길 것이다.
“내가 날씨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이 한 마디에 김동수 열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나고 자란 고향 마을로 돌아와서일까? 추모문화제에서 만난 김동수 열사는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무성한 이파리로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마을 어귀 정자 나무 아래에 조촐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열사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씻김굿이 이어진다. 열사를 태운 반야용선이 넘실넘실 하얀 바다를 건너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옆에 앉아 계신 열사의 어머니가 혼자 넋두리하듯 조용히 말한다. “잘가거라.”
영원한 청춘을 사는 것은 열사만이 아니다. 김준태 시인은 광주를 일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라고 하였다. 그날의 광주 역시 열사들처럼 흐르는 세월을 비켜 홀로 우뚝 서 있다.
광주는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서 영원한 청춘이라는 천형을 받고 있다. 당장 나부터도 이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조금은 더 즐겁고 조금은 더 축제처럼 광주의 정신을 기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날 것의 고통을 굳이 매번 마주해야 할까 의문스러웠다.
고통스럽고 암울했던 과거는 털어버리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숙성되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이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할 뿐이다. 역사 속 광주는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영원한 청춘의 도시이다.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춘을 살고 있는 열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열정으로 불태우고 있다.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그때, 처음으로 전태일 열사를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나도 그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지금도 썬팅된 차창으로 내리쬐던 칙칙하고도 나른했던 햇살의 기억이 생생하다.
평소 친분 있는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젊은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길래, “열사의 삶을 지표로 삼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젊은 청년 전태일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지금도 여전하다. 다만 게으른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 오늘의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젊은 학생들 역시 김동수 열사를 마음 속 깊이 새겨, 평생 지니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면 언젠가 그 어떤 날 삶이 힘들 때, 해맑은 얼굴로 불쑥 열사가 그대들을 반길 것이다.
“내가 날씨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이 한 마디에 김동수 열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