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을 권하는 불신사회-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1월 19일(금) 07:00
벌써 한 달이 다 된 일이다. 2023년 12월 12일, 나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고 안내 문자가 화근이었다. 그 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실제 해킹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현재까지 알려진 피해는 없다. 어쨌든 여러가지 취한 조치 중 하나가 신용카드의 도난 신고였다. 멀쩡하게 잘 있는 신용카드를 도난당했다고 신고하고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해야만 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지갑을 다시 꺼냈다. 아무 생각없이 카드를 내밀던 일상이 주섬주섬 돈을 건네 주고, 또 기다렸다가 거스름돈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아예 카드로만 결제하는 가게도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키오스크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가게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테이블에 앉으면, 직원은 오지도 않고 대신 태블릿 같이 생긴 단말기만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는 가게도 많다. 졸지에 시대에 뒤쳐져서 세상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확실히 신용카드가 편리하긴 편리하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사실 카드 거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다. 뭔가 오가는 현물이 없는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실제로는 복잡하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금융전산망 어딘가에서 나의 ‘잔액’ 항목에 기재된 숫자가 커피값만큼 감소할 것이고 대신 카페사장님의 ‘잔액’ 항목은 그만큼 증가할 것이다.

카페 사장님이 나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이유는 나와 그가 금융전산망을 포함한 금융시스템 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손바닥 보다도 훨씬 더 작은 볼품없는 플라스틱 조각을 매개로 형성된, 보이지 않는 신뢰가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이런 신뢰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지탱한다. 그러므로 이 사회의 경제시스템과 금융전산망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 이 사회는 곧바로 붕괴하고 만다. 기실 알고 보면 이 사회는 구성원들의 믿음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 같은 존재이다. 일본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선진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금에 대한 선호도가 강하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한 일본의 특성 때문에 금융전산망에 대한 신뢰가 쉽사리 국민들 사이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탓이다. 하긴 지진이 나서 통신은 고사하고 전기도 다 끊어진 비상 상황에서 신용카드는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후, 모르는 전화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는 받지도 열어보지도 않는다. 보이스피싱 덕분에 전화 너머의 사람들과 문자 뒤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믿을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합쳐진 글자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말씀 언(言)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올리는 축문과 신의 계시를 담은 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신(信)은 원래 편지를 의미했다고 한다. 즉 “축문은 믿을만 하고 신의 계시는 마땅히 믿어야 하나 사람의 말은 그에 비하면 믿을 것이 못된다. 하지만 편지는 중요한 정보를 담아 믿을만한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중에 믿음이라는 의미로 발전했다고 한다. 전화나 문자는 곧 우리 시대의 편지에 다름 아니다. 이들 역시 믿음을 전제로 한다. 믿음이 없다면 지금의 나처럼 무용지물이다.

일찍이 공자는 ‘無信不立’(무신불립)이라 하였다.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는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논어의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고도로 발전한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근간은 바로 믿음에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믿음 위에 건설된 이 모든 것들을 원래부터 그런 것, 혹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당연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신용카드의 핵심은 신용에 있다. 아마도 믿고 쓰라고 신용(信用)이라는 두 글자를 이름에 넣은 모양이다. 현대사회의 편리함은 믿음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믿음을 무기로 오늘날의 강력한 문명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불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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