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황성호-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1년 08월 06일(금) 06:00 가가
코로나19 사태로 파생되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즘 필자가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위해 조용히 일하는 이들, 가난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다. 더 이상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인내하고 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창궐은 한편으로 새로운 형태의 이기적인 자기 보호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가족이나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 내려고 노력하지만, 내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관심조차도 없다. 굶거나 죽어가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당신의 저서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극복하였다고 여기던 구시대적인 분쟁이 고조되고, 폐쇄적이고 격렬하고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되살아납니다”(11항)라고 하시면서 극단적 집단이기주의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우리 모두가 불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여전히 많은 형제자매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도 되는 양, 과거의 성취에 만족하며 머물러 즐기고 있지 말라는 말씀이다.
많은 학자들은 코로나19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지나간 후 우리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미래가 다가올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자포자기할 수 없다. 적극적인 자세로 미래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우리 사회를 분열시켰고 차별을 만들어 냈던 편견에 굳건히 맞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는 조금 더 밝아질 것이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특권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이 특권의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게 했고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모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다른 이들보다 무엇을 더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열등하게 대하고 착취했던가! 그러나 중독과도 같은 이 특권의식은 한번 누렸던 것이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번 맛있는 것을 맛본 사람이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들이 다가왔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삶을 살면서도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 어려움을 하나가 되어 함께 이겨 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그랬고,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라는 힘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인류가 ‘우리’라는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구원 역사의 시작에 ‘우리’가 있었고, 그 마침에도 ‘우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우리’에게서 발생되고,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나’만을 위하고 ‘자국’만을 위하는 폐쇄적인 편협함에서 벗어나 ‘우리’를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을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 취업이 어려워 단순 노동에 내몰리는 청년들, 나이 들어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골방에 갇힌 어르신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도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독한 무더위에 방화복을 입고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 종사자들도 ‘우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다음으로 ‘우리’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들이 다가왔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삶을 살면서도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 어려움을 하나가 되어 함께 이겨 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그랬고,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라는 힘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인류가 ‘우리’라는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구원 역사의 시작에 ‘우리’가 있었고, 그 마침에도 ‘우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우리’에게서 발생되고,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나’만을 위하고 ‘자국’만을 위하는 폐쇄적인 편협함에서 벗어나 ‘우리’를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을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 취업이 어려워 단순 노동에 내몰리는 청년들, 나이 들어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골방에 갇힌 어르신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도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독한 무더위에 방화복을 입고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 종사자들도 ‘우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