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8할
2018년 06월 11일(월) 00:00 가가
[정봉남 순천 기적의도서관장]
일 년에 한 번씩은 비행기를 타 보자고 했다. 열심히 적금을 붓고 알뜰하게 연가를 모아 친구들과 해외 도서관 탐방에 나선 것이 어느덧 세 해째다. 도서관을 운영하거나 돕거나 좋아하는 이들, 책과 사람이 좋아서 인생의 8할이 독서 운동이 되어 버린 이들과 시작한 여행은 북유럽, 싱가포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이어졌다.
8박10일 동안 도서관과 미술관과 서점 스물여덟 곳을 돌아봤다고 하면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도서관에 미친 징그러운 인간들이라고. 그러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함께 떠날 친구들이 있음을 부러워했다. 함께여서 고마운 ‘길 위의 친구들’은 한 해의 도서관 여행이 마무리될 즈음엔 내년 여행지를 정하고 우리끼리 ‘설렘주의보’를 내린다.
꿈의 도서관들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좋아서 힘든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배낭여행에 가까워서 비싼 택시만 빼고 트램, 기차, 버스, 지하철, 자동차, 배, 두 발로 그 동네의 온갖 탈 것들을 다 이용했다. 하루에 3만 보씩 걷는 건 기본, 양말을 벗어 보면 엄지발톱이 퍼렇게 멍들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도서관을 만나면 눈빛이 반짝였다. 이쯤 되면 어느새 동네가 머릿속 지도에 그려지고 현지인처럼 헤매지 않고 다닐 만하다 여겨지는데 그러면 이제 이 도시를 떠날 때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한 도시의 문화를 며칠의 여행으로 어찌 알 것인가. 그래서 미리 찾아보고 적어 온 것을 토대로 정말 그런가? 무엇이 다른가?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도서관 관계자와 독서 단체 사람들을 만나는 미팅 시간에는 단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빼곡히 채워 온 노트를 들춰 가며 우리끼리 가이드가 되고 통번역자가 되어 주었다. 우리가 묻고 그들이 답하면서 삶의 방식과 문화의 토대는 달라도 책으로 하나 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다. 숙소에 돌아오면 와이파이 안테나가 사라지기 전에 일기를 썼다.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면서 여행을 삶처럼 실행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니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책 마을에서 발견한 초판본의 그림책, 백 년도 넘은 동화책을 보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돌아 나올 수는 없었다. 신기한 책을 볼 때마다 감탄하며 사 모은 것이 보따리를 가득 채웠다. 디자인 멋진 도서관의 홍보물들과 벼룩시장에 나온 고서들, 지역의 역사를 아카이브한 도서관 자료와 엽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책과 캐릭터 인형, 특산품들을 이고 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흡사 ‘보따리 장사’ 같았다. 돌아와 무수한 사진들을 뽑아 앨범을 만들고, 비행기 타고 온 물건들을 책상에 펼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마당을 펼쳤다. 책 모양의 맛이 희한한 젤리를 나눠 먹으면서 여행기의 한 자락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앞으로도 도서관 여행은 계속될 듯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들의 여행도 자연스럽게 진화했다. 오로지 도서관과 서점, 책 문화 공간에 꽂혀 있다가 조금씩 미술관과 책 마을, 예술극장과 벼룩시장으로 발길이 넓혀졌고 짬짬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의 시간들을 누렸다. 처음엔 그저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도서관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꿈꾸는 이상들이 이 나라 현실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 꿈만 같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판타지 같았다고나 할까.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담담하게 감동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가능성, 우리의 현재에 대한 애틋함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다. 우리는 우리대로 걸어갈 길이 있고 거기에 담겨지는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본 이상 세계가 있으니 적어도 도서관의 미래를 향한 기준 하나는 붙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영혼이 노니는 천국의 서점’을 가만가만 거닐 때, 햇살 좋은 오후의 노천카페에서 로컬 맥주로 입술을 적실 때, 아름다운 유리벽에 반사되는 책들의 반짝임을 볼 때, 책이 있는 공간에서 식사를 할 때, 그림만으로 홀리는 책의 유혹을 느낄 때, 이토록 아름다운 책 공간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어 주어진 뜻밖의 한나절, 네덜란드 시인의 이름을 딴 공원에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질 때도 그랬다. 유난히 햇빛 좋은 휴일이라 사람들은 공원에서 일광욕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공 차고 뽀뽀하고 대화하고 책 읽고 잠자고 놀고 뛰고 걷고 먹고 마시고 웃고 자전거를 탔다.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자유로이 펼쳐진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들이 가장 잘하는 말, ‘노 프로블럼’(No problem).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반짝, 내다 말리는 하루가 좋아서 눈물이 났다. 여행은 자꾸 우리의 삶을 반사시킨다. 익숙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늘 새로워질 것을 요청하는 묘약인 탓일까.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꿈의 도서관들을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좋아서 힘든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배낭여행에 가까워서 비싼 택시만 빼고 트램, 기차, 버스, 지하철, 자동차, 배, 두 발로 그 동네의 온갖 탈 것들을 다 이용했다. 하루에 3만 보씩 걷는 건 기본, 양말을 벗어 보면 엄지발톱이 퍼렇게 멍들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도서관을 만나면 눈빛이 반짝였다. 이쯤 되면 어느새 동네가 머릿속 지도에 그려지고 현지인처럼 헤매지 않고 다닐 만하다 여겨지는데 그러면 이제 이 도시를 떠날 때가 됐음을 알아차린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들의 여행도 자연스럽게 진화했다. 오로지 도서관과 서점, 책 문화 공간에 꽂혀 있다가 조금씩 미술관과 책 마을, 예술극장과 벼룩시장으로 발길이 넓혀졌고 짬짬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의 시간들을 누렸다. 처음엔 그저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도서관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꿈꾸는 이상들이 이 나라 현실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 꿈만 같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판타지 같았다고나 할까.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담담하게 감동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가능성, 우리의 현재에 대한 애틋함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다. 우리는 우리대로 걸어갈 길이 있고 거기에 담겨지는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본 이상 세계가 있으니 적어도 도서관의 미래를 향한 기준 하나는 붙잡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영혼이 노니는 천국의 서점’을 가만가만 거닐 때, 햇살 좋은 오후의 노천카페에서 로컬 맥주로 입술을 적실 때, 아름다운 유리벽에 반사되는 책들의 반짝임을 볼 때, 책이 있는 공간에서 식사를 할 때, 그림만으로 홀리는 책의 유혹을 느낄 때, 이토록 아름다운 책 공간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어 주어진 뜻밖의 한나절, 네덜란드 시인의 이름을 딴 공원에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질 때도 그랬다. 유난히 햇빛 좋은 휴일이라 사람들은 공원에서 일광욕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공 차고 뽀뽀하고 대화하고 책 읽고 잠자고 놀고 뛰고 걷고 먹고 마시고 웃고 자전거를 탔다.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자유로이 펼쳐진다는 게 신비로웠다. 그들이 가장 잘하는 말, ‘노 프로블럼’(No problem). 모두가 저마다의 삶을 반짝, 내다 말리는 하루가 좋아서 눈물이 났다. 여행은 자꾸 우리의 삶을 반사시킨다. 익숙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늘 새로워질 것을 요청하는 묘약인 탓일까.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