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보리밥(麥飯)에 파국(蔥湯) 뿐이로다
2018년 05월 21일(월) 00:00 가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
학자란 배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글을 알고 조금 배웠다고 ‘학자’라고 칭해 주지는 않는다. 깊은 학문을 지니고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불러 주는 호칭이 학자이다. 그래서 인물을 평가하고 인물들의 등급을 매기는 역사책에서도 학행(學行)편에 올라,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효행(孝行)·문행(文行) 등에 오른 인물들도 모두 훌륭한 인물임은 사실이지만, 최고의 등급은 학행 편에 오른 학자가 가장 높은 호칭이다.
이런 이유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서 높은 벼슬은 ‘정승’인데, 정승 3인이 나와야 학자 한 사람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임금 다음의 최고 지위가 정승인데, 정승 3인을 합해야 학자 한 사람과 맞먹는다니 학자의 위상을 알 만하다.
조선 중기 우리 호남에는 말 그대로 학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태인에 살았던 일재 이항(李恒:1499∼1576), 장성에 살았던 하서 김인후(金麟厚:1510∼1561), 광주에 살았던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 등은 호남의 학자가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들이었다. 김인후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문묘(文廟)에 배향된 한 단계 위의 학자인 탓인지, 한때 호남을 남북으로 나눠 북에는 이항이요, 남에는 기대승이라 일컬으며 두 분을 대표적 학자로 칭송한 사람도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평가였다.
이항은 오래전부터 경상도의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 등과도 학문적 교류를 했었고, 뒷날 기대승은 서울에 올라가 벼슬하면서 서울에 온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대한 토론을 계속하였다. 특히 기대승과 이황의 8년에 걸친 학술 논쟁인 ‘사단칠정’에 대한 왕복 서찰의 대토론은 조선 성리학 역사에서 금자탑을 이룩한 학술적 업적이었다.
이러던 무렵 어느 날 고봉 기대승은 태인으로 일재 이항을 방문하여 학술 토론을 했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높았고 나라 안에 이름이 가득하던 기대승이, 벼슬은 차단하고 농사지으며 학문만 연구하던 처사(處士) 이항을 찾아간 셈이다. 이항은 그날 집에서 마당에 널려 있던 보리를 도리깨로 타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기대승은 농부에게 “이 댁이 일재 선생 댁인가요?”라고 물었다. 농부가 그렇다고 답하고는 우선 사랑으로 들어가 계시라며 안내하였다. 일재가 곧 방으로 들어갈 것이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한참 뒤 일재가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그 농부가 바로 일재였다. 그러면서 맞절을 하는데 “저를 사람들이 일재라고 부른답니다”라고 말하더란다.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 보리를 타작하지 않으면 밥 끓일 양식이 없어 제가 양식 준비를 하느라 타작을 하였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잠시 뒤에 밥상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꽁보리밥과 멀건 물에 파가 둥둥 떠 있는 국이었으니, 이른바 ‘맥반총탕’(麥飯蔥湯)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귀공자의 신분이던 기대승은 입에 맞는 음식이 아니었으나,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식사를 마친 일재는 의복을 갈아입고 처사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대승과의 학술 토론을 시작했다. 눈빛이 형형해진 일재는 농부의 모습에서 대학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대승의 물음에 척척 답을 하면서 성리학의 오묘한 진리를 거침없이 설파하였다고 한다. 당대 석학들의 불꽃 튀는 논쟁이 끝난 후, 기대승은 다시 경건한 모습으로 대선배 일재에게 큰 절을 올리며 앞으로 많은 학문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재 이항 선생, 학행으로 천거받아 많은 벼슬이 내렸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고, 가난의 어려움 속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진리 탐구에 생애를 걸었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큰 이름을 얻었으니,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대표이자 학문이 높았던 건재 김천일 장군이 바로 일재의 제자였다. 권력과 부가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이지만, 일재는 권력과 부를 멀리하고 학문에만 삶의 목표를 두었기에, 끝내 대학자의 반열에 올라 아름다운 이름을 천추에 전하고 있다.
비록 살아서야 가난 속에 도를 즐기고 살았던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한 국왕은 사후에 일재에게 문경(文敬)이라는 귀한 시호를 하사하고 높은 벼슬을 증직하여 학자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일재를 존경하고 따랐던 기대승 또한 사후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높은 벼슬도 증직되었다. 학문이 높은 학자는 그래서 큰 이름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선 중기 우리 호남에는 말 그대로 학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태인에 살았던 일재 이항(李恒:1499∼1576), 장성에 살았던 하서 김인후(金麟厚:1510∼1561), 광주에 살았던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 등은 호남의 학자가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던 학자들이었다. 김인후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문묘(文廟)에 배향된 한 단계 위의 학자인 탓인지, 한때 호남을 남북으로 나눠 북에는 이항이요, 남에는 기대승이라 일컬으며 두 분을 대표적 학자로 칭송한 사람도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평가였다.
집안으로 들어온 기대승은 농부에게 “이 댁이 일재 선생 댁인가요?”라고 물었다. 농부가 그렇다고 답하고는 우선 사랑으로 들어가 계시라며 안내하였다. 일재가 곧 방으로 들어갈 것이라고도 말했다는 것이다. 한참 뒤 일재가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그 농부가 바로 일재였다. 그러면서 맞절을 하는데 “저를 사람들이 일재라고 부른답니다”라고 말하더란다.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 보리를 타작하지 않으면 밥 끓일 양식이 없어 제가 양식 준비를 하느라 타작을 하였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잠시 뒤에 밥상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꽁보리밥과 멀건 물에 파가 둥둥 떠 있는 국이었으니, 이른바 ‘맥반총탕’(麥飯蔥湯)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귀공자의 신분이던 기대승은 입에 맞는 음식이 아니었으나,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식사를 마친 일재는 의복을 갈아입고 처사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대승과의 학술 토론을 시작했다. 눈빛이 형형해진 일재는 농부의 모습에서 대학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기대승의 물음에 척척 답을 하면서 성리학의 오묘한 진리를 거침없이 설파하였다고 한다. 당대 석학들의 불꽃 튀는 논쟁이 끝난 후, 기대승은 다시 경건한 모습으로 대선배 일재에게 큰 절을 올리며 앞으로 많은 학문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재 이항 선생, 학행으로 천거받아 많은 벼슬이 내렸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고, 가난의 어려움 속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진리 탐구에 생애를 걸었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큰 이름을 얻었으니,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대표이자 학문이 높았던 건재 김천일 장군이 바로 일재의 제자였다. 권력과 부가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이지만, 일재는 권력과 부를 멀리하고 학문에만 삶의 목표를 두었기에, 끝내 대학자의 반열에 올라 아름다운 이름을 천추에 전하고 있다.
비록 살아서야 가난 속에 도를 즐기고 살았던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한 국왕은 사후에 일재에게 문경(文敬)이라는 귀한 시호를 하사하고 높은 벼슬을 증직하여 학자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일재를 존경하고 따랐던 기대승 또한 사후에 문헌(文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높은 벼슬도 증직되었다. 학문이 높은 학자는 그래서 큰 이름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