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지 않을 날들을 위하여
2018년 05월 14일(월) 00:00 가가
[정봉남 순천 기적의도서관장]
어버이날이 가까워져 엄마를 보러 고향 집에 갔다. 출발한다고 전화를 드렸을 때는 낮잠 주무신다고 했는데 도착할 즈음엔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린애처럼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기고 서로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대로 엄마 냄새 맡고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엄마는 급히 할 일이 있으니 쉬고 있으라 하셨다.
팔순의 엄마는 오랜만에 자식들이 집안에 북적거리니 좋으셨던 것이다. 마당의 큰 솥단지에 물을 한 가득 채우더니 손질해서 얼려 둔 알밤이랑 녹두를 넣고, 말린 대추와 황기를 넣고, 보기에도 튼실한 토종닭을 넣고, 굵은 소금 한 줌 집어넣어 장작불을 피우셨다.
굴뚝에 매캐한 연기가 오르고 타닥타닥 나무 타는 냄새가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을 휘감았다. 장작불의 훈훈함은 해거름의 눅눅한 공기를 말려 주었는데 불 냄새를 맡자 그립고 따뜻한 고향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엄마가 사랑과 아픔으로 낳고 기른 딸들, 어느새 그 딸들이 자라 또 다른 아픔과 사랑으로 기른 손주들이 거기 있었다.
솥에서 폭폭 김이 솟을 때 엄마는 장독대 항아리를 열어 묵은지를 숭덩숭덩 썰어 담고 큰언니는 머위 나물을 들깨 가루에 볶아 접시에 올렸다. 남동생은 널따란 쟁반에 닭백숙을 건져 손으로 찢었다. 엄마는 또 그새 찹쌀을 넣어 죽을 쑤고 우리들은 담백하고 고소한 백숙을 기름장에 찍어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이 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맛이다. 뚝딱 차려 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기막히게 맛있는 마법의 요리는 바깥 세상에 지친 우리들의 허기를 단숨에 채워 주었다.
맛있는 음식의 진짜 비밀은 그것이 가족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모든 재료들이 한데 모여 더 커다란 무언가를 만들기 때문이다. 먹고 웃고 떠들면서 코끝 찡해진 엄마표 음식의 비결은 오직 사랑과 정성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기억에 남는 모든 맛있는 음식에는 누군가와 함께해 온 오랜 시간의 향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무릇 진정으로 맛있는 음식에는 그 사람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그 음식의 맛과 그 사람의 영혼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가 담겨 있다.”(‘월간 정여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가족들이 생각나는 것은 인지상정. 해 먹는 밥보다 사 먹는 밥이 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애틋하다. 그래서 책의 문장을 빌어 대신 마음을 전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육체를 보살펴야 한다. 네 육체에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 좋은 향기를 맡게 해 주어라…. 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부터 시작해야 해.”(‘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갈수록 실제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 맛집을 찾는 데 익숙해진다. 화면으로 보는 맛을 실제로 느껴 보기 위해 검색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이토록 풍요로운 음식을 앞에 두고서 왜 자꾸 허기가 질까? 상품화된 요리에 익숙해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철학자들은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식품이 늘어날수록 집에서 하는 따뜻한 요리에 대한 집단적 노스탤지어가 커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편의점 음식들이 위장은 채워 주지만 마음의 공허는 채워 주지 못하고, 오히려 따뜻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불 지필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우리들 마음 저 깊은 곳에는 풍성한 재료들을 만지고 음식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심리적 욕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의 민족’다운 편리함의 추구와 어지간한 것들은 대행 서비스로 돌리는 간편함에서 우리는 이토록 고독을 자초한 것일까.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본 청춘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배가 고파서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 혜원이 자신 같았다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면서 포카칩과 라면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우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밥하는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 먹으려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그럴 때에야 자신은 물론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험, 연애, 취직, 그 어느 것 하나 풀리지 않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자신을 위한 식탁을 차리면서 마음을 일으킨 것처럼.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정성들인 음식을 만들고,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자연의 재료들로 계절을 느끼는 것은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길이다. 우리 입에 들어오는 모든 먹을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수고로 오는 것이니 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먹을 것과 기쁨을 선사하는 자연의 넉넉한 인심은 물론이다.
햇볕에 말려 놓았던 도마와 숫돌에 간 날렵한 부엌칼로 오징어 껍질을 벗기고 양파를 썰고 마늘을 다진다. 껍질 깐 양파의 신선한 생명력을 손끝에 느낄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밥값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팔순의 엄마는 오랜만에 자식들이 집안에 북적거리니 좋으셨던 것이다. 마당의 큰 솥단지에 물을 한 가득 채우더니 손질해서 얼려 둔 알밤이랑 녹두를 넣고, 말린 대추와 황기를 넣고, 보기에도 튼실한 토종닭을 넣고, 굵은 소금 한 줌 집어넣어 장작불을 피우셨다.
솥에서 폭폭 김이 솟을 때 엄마는 장독대 항아리를 열어 묵은지를 숭덩숭덩 썰어 담고 큰언니는 머위 나물을 들깨 가루에 볶아 접시에 올렸다. 남동생은 널따란 쟁반에 닭백숙을 건져 손으로 찢었다. 엄마는 또 그새 찹쌀을 넣어 죽을 쑤고 우리들은 담백하고 고소한 백숙을 기름장에 찍어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이 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맛이다. 뚝딱 차려 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기막히게 맛있는 마법의 요리는 바깥 세상에 지친 우리들의 허기를 단숨에 채워 주었다.
갈수록 실제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 맛집을 찾는 데 익숙해진다. 화면으로 보는 맛을 실제로 느껴 보기 위해 검색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이토록 풍요로운 음식을 앞에 두고서 왜 자꾸 허기가 질까? 상품화된 요리에 익숙해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철학자들은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식품이 늘어날수록 집에서 하는 따뜻한 요리에 대한 집단적 노스탤지어가 커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편의점 음식들이 위장은 채워 주지만 마음의 공허는 채워 주지 못하고, 오히려 따뜻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불 지필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우리들 마음 저 깊은 곳에는 풍성한 재료들을 만지고 음식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심리적 욕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의 민족’다운 편리함의 추구와 어지간한 것들은 대행 서비스로 돌리는 간편함에서 우리는 이토록 고독을 자초한 것일까.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본 청춘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배가 고파서 고향에 내려온 주인공 혜원이 자신 같았다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면서 포카칩과 라면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우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밥하는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 먹으려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그럴 때에야 자신은 물론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시험, 연애, 취직, 그 어느 것 하나 풀리지 않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자신을 위한 식탁을 차리면서 마음을 일으킨 것처럼.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정성들인 음식을 만들고,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자연의 재료들로 계절을 느끼는 것은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길이다. 우리 입에 들어오는 모든 먹을 것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수고로 오는 것이니 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먹을 것과 기쁨을 선사하는 자연의 넉넉한 인심은 물론이다.
햇볕에 말려 놓았던 도마와 숫돌에 간 날렵한 부엌칼로 오징어 껍질을 벗기고 양파를 썰고 마늘을 다진다. 껍질 깐 양파의 신선한 생명력을 손끝에 느낄 때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밥값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