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가 76%로
2018년 04월 23일(월) 00:00 가가
[문요한 정신과 의사]
얼마 전 대학 선후배 모임에서의 일이다. 동기 중 한 명이 운전한다며 술을 안 마셨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배가 한마디 했다. “야! 대리하면 되잖아. 내가 대리 운전비 줄게. 네가 안마시니까 분위기가 흐려지잖아.” 동기는 그래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선배는 화를 냈다. “어울리지 않을 거면 뭐 하러 왔어! 야, 다음번에 이 녀석한테 연락하지 마. 선배 말을 아주 우습게 알고 있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결국 동기 녀석은 1차만 하고 먼저 집에 갔다. 왜 그 선배는 모두가 다 같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집에 오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 대학에 입학하자 동문 선배들이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이름하여 사발식이었다. 라면 그릇에 한가득 막걸리를 부어 팡파르 합창이 끝나기 전에 마셔야 했다. 그냥 마시면 심심하다며 담뱃재를 털어 넣은 선배도 있었다. 한 명씩 사발식을 할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동기 하나가 못 마시겠다고 버텼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선배들 몇 명이 데리고 나갔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동기는 다시 들어와서 사발을 비웠다.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내 차례가 왔다.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다. 그날 밤은 모두 술에 취해 난장판이 벌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난 지난밤을 부끄러워했을까? 기억에 없다. 대신 동문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소속감이 들었다. 그리고 1년 뒤 난 선배가 되었다. 나는 아무런 의문 없이 후배들을 환영한다며 라면 그릇 한가득 술을 부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 불합리한 문화에서도 개인보다는 집단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주관보다는 조화를 중시하며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멈춰 있지 않다. 과거에는 당연했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게 허다하다. 올해 동계올림픽 단일팀 구성 논란을 보면서도 그 변화를 실감했다. 나는 민족의 대의를 위해 몇몇 선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의 자발적 동의 없는 희생은 불공정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젊을수록 그런 의견이 많았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생각해 볼수록 그게 맞았다. 우리는 권위적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별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염려하는 것은 집단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과 개인의 균형이지 양자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 온 문화의 유산이다. 지금이야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이지만 초기 인류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중간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 인간은 발도 느린 데다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었다. 그러한 나약한 인간이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단적 협력’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생명체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뛰어난 게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뛰어난 종으로 진화하였다. 고도의 사회성을 갖춘 것이다. 이는 우리의 뇌와 유전자, 그리고 문화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바라고, 그 문화에 동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협력을 위해서이다. 물론 그 역기능도 있다. 불합리한 문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 동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관행’이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 ‘적응’이라고 합리화한다. 서양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40여 년 전에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바 있다. 애쉬는 대학생들에게 세로 선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보여 주고, 또 다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선에서 길이가 같은 것을 찾아보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선의 길이 차이가 크기 때문에 오답률이 1%도 되지 않는 아주 쉬운 문제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핵심은 참가자 앞에 다섯 명의 가짜 참가자가 오답을 말하는 것에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앞 사람들이 오답을 이야기하니 여섯 번째 사람도 오답을 말하는 일이 무수히 벌어진 것이다. 무려 76%에 달하는 대학생들은 쉬운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 이상씩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느라 오답을 이야기했다. 끝까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정답을 이야기한 사람은 불과 24%에 불과했다.
이것이 인간 사회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것에서 불안을 느끼고, 집단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개인의 판단과 결정까지 무의식적으로 바꿔 버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는 바뀌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충돌이 커지고 있지만 결국 24%를 존중해 주는 다원화된 사회로 변화되고 있다. 자신의 판단을 중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24%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사회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인정받는 사회로 바뀌어 갈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이야기한 24%가 76%로 늘어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집단주의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 온 문화의 유산이다. 지금이야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이지만 초기 인류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중간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 인간은 발도 느린 데다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었다. 그러한 나약한 인간이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단적 협력’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이란 생명체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뛰어난 게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뛰어난 종으로 진화하였다. 고도의 사회성을 갖춘 것이다. 이는 우리의 뇌와 유전자, 그리고 문화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바라고, 그 문화에 동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협력을 위해서이다. 물론 그 역기능도 있다. 불합리한 문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 동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관행’이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 ‘적응’이라고 합리화한다. 서양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40여 년 전에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바 있다. 애쉬는 대학생들에게 세로 선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보여 주고, 또 다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선에서 길이가 같은 것을 찾아보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선의 길이 차이가 크기 때문에 오답률이 1%도 되지 않는 아주 쉬운 문제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핵심은 참가자 앞에 다섯 명의 가짜 참가자가 오답을 말하는 것에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앞 사람들이 오답을 이야기하니 여섯 번째 사람도 오답을 말하는 일이 무수히 벌어진 것이다. 무려 76%에 달하는 대학생들은 쉬운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 이상씩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느라 오답을 이야기했다. 끝까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정답을 이야기한 사람은 불과 24%에 불과했다.
이것이 인간 사회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것에서 불안을 느끼고, 집단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개인의 판단과 결정까지 무의식적으로 바꿔 버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는 바뀌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충돌이 커지고 있지만 결국 24%를 존중해 주는 다원화된 사회로 변화되고 있다. 자신의 판단을 중시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24%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는 사회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인정받는 사회로 바뀌어 갈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이야기한 24%가 76%로 늘어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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