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나의 머릿속에 남아 특별하게 잊히지 않는 학자 두 분이 있다. 경기도 안산에서 일생 동안 학문만 연구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과 호남의 장성에서 평생토록 학문만 연구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그분들이다. 거의 백 년의 터울로 성호는 18세기, 노사는 19세기의 인물이었다. 서로 지역도 다르고 생존 시기도 달라 전혀 교류의 가능성은 없었지만, 83세와 82세의 장수를 누리며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어도 일체 응하지 않으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들의 양성으로 생애를 바쳤던 점에서 두 분은 많은 유사점이 있다.

18세기에 조선 실학사상의 핵심을 완성해 다산 정약용에게 넘겨주었고, 성리학에서도 새로운 이론을 많이 개척한 공로가 있는 분이 바로 성호였으며, 19세기 쇠퇴해 가던 성리학을 다시 일으켜 독특한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체계를 세웠고,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여 척사위정(斥邪衛政)의 논리로 엄습해 오던 외세를 막아 낸 논리를 개척했던 분이 노사였다.

한데 성호는 실학의 거장이자 대학자로 숭배받으며 세상에 많이 알려진 데 비해, 노사는 세상에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 실학이야 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이지만, 성리학은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요, 위정척사 운동의 효시(嚆矢)인 상소문을 올린 노사를 그렇게도 알아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호남 사람으로서 호남 최고의 성리학자요,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 내서 ‘노사학파’ 하면 역사적으로도 손꼽힐 큰 학파를 이룩한 학자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노사는 독특한 학설을 창안하여 율곡과 같은 대학자의 이론도 비판했으며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새로운 이론을 과감하게 주장한 학자였다. 진사과에 장원하여 나라에서 고관인 호조참판이라는 벼슬까지 내렸어도 학문연구에 생애를 바치느라 일체의 벼슬에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르고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에 호남 일대 제자들은 말할 것 없이 경상도의 여러 고을 출신까지 제자로 들어와 영호남에 유리론이라는 성리학 체계를 풍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서세동점의 국제 정세 아래 민족 정통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위정척사 논리가 확대되어, 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은 대체로 노사 학파의 제자들이 주도하기도 하였다.

장성군의 진원면 고산리에는 노사 선생을 주벽으로 뛰어난 제자들 8분이 배향된 ‘고산서원’이 있는데, 해마다 봄과 가을로 전국의 유림이 모여 제사를 봉행하며 ‘노사학’을 강론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방대한 노사 문집인 ‘노사집’(盧沙集)을 번역하고 있어 간행될 날이 멀지 않다. 최근에는 고산서원에 ‘노사학연구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노사의 학문 전체인 ‘노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사학파나 노사학단은 세력이 너무 약하다. 인적 기반도 약하지만 물적 기반도 너무나 약해, 노사학의 진정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노사의 일생을 살펴보며 그의 학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사는 그의 학문이 가장 왕성한 나이 46세에 당시 학계에서 크게 거론되던 ‘호락시비’(湖洛是非)에서 벗어나, 독특한 ‘납양사의’(納凉私議)를 저술함으로써 호론(湖論)과 낙론(洛論)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학문적으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죽음이 가까워 오던 81세에, 평생 동안 가슴속에 안고 있던 학설인 유리론으로 율곡의 문제점을 지적한, ‘외필’(猥筆)이라는 대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집념이 강한 학자를 어디서 쉽게 찾겠는가. 그래서 화담·퇴계·율곡 등과 함께 노사를 조선 6대 성리학자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한말의 대문장가 영재 이건창은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 노사의 손자로 학자이자 의병장이던 송사 기우만을 찾아와 노사의 학문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건창이 노사 학문에 대한 시를 지었다.

“사방으로 둘러싼 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四面高山堪起敬)/ 성긴 대밭에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一區疎竹不藏貧)/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당할 선배가 없고(精心造道無前輩)/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樸學承家有後人)” 노사의 높은 학덕은 이 한 구절의 시로써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