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黑齒常之, ?∼689)는 백제 출신의 무장이다.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된 후 부흥운동에 앞장섰다가 당의 장수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당나라로 들어가 토번과 돌궐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측천 황제 시절 혹리 주흥의 무고로 옥에 갇혔는데 689년 자결했다.

백제의 서부 출신으로 키가 7척이 넘었고 용감하며 지략을 겸비했다. 벼슬길에 올라 달솔 겸 군장이 되었는데 중국의 자사와 비슷한 직위였다.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거느리던 군대와 함께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자와 태자를 가두고 많은 사람들을 겁탈하거나 약탈하므로 저항운동에 나섰다. 임존성에서 항거하니 한달도 못되서 3만여명이 몰려왔다.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함락되자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유인궤의 부장 손인사가 “이들은 짐승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자 유인궤는 “두 사람을 보니 믿음을 돈독히 하고 의를 중히 생각한다”며 항복을 받아들였다.

항복 후 당의 장수로 활약했다. 664년 백제땅으로 돌아와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웅진도독부가 신라의 공격으로 소멸되자 당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후 돌궐과 토번의 공략에 주력했다. 678년 이경현이 18만명을 거느리고 토번의 장군 논흠릉과 청해에서 싸워 대패하고 공부상서·우위대장군 유심례가 포로가 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좌령군 원외장군 흑지상지는 밤에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적의 영채를 공격했다. 논흠릉의 장수인 발지 설은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고 이경현은 남은 군대를 거느리고 청해성 낙군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공으로 좌무위장군으로 발탁되고 청해성 하원군의 부사로 임명되었다.

680년 가을 토번이 청해성 하원을 노략질하니 그들과 싸워 승리했다. 이 공으로 하원군경략대사가 되었다. 그는 하원이 군사 요충지인 점을 고려해 군대를 늘려 방어하려 하였으나 군대와 물자 수송하는 길이 험해 부득이 봉화대 70여 곳을 설치했다. 둔전 5천여 경을 경작해 연 5백만여석을 수확해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다. 다음해에는 토번의 논찬파를 양비천에서 공격해 승리하고 그들의 양식과 가축을 얻어 귀환했다. 그가 있는 7년 동안 토번은 그를 두려워해 감히 변경을 범할 수 없었다.

684년 명장 이적의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 타도의 난을 일으켰다. 황족인 이효일이 30만명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좌웅양대장군직에 있던 흑지상지는 강남도대총관이 되어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이경업 난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압되고 그는 당의 대표적인 장수로 신임받게 되었다.

686년 돌궐이 변경을 침입하자 이를 잘 막았다. 내몽골 음산산맥 동쪽에 있는 양정에서 돌궐군 3천여명과 부딪혔는데 그는 200여 기병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날이 어둡자 군영내에 불을 지르고 동남쪽에서도 불이 나자 돌궐군은 당의 군대가 서로 호응하는 것으로 의심해 도주하였다.

687년 동돌궐의 18대 가한인 아사나골독록과 아사덕원진이 산서성 삭주에서 변경을 넘어 노략질을 하자 조정은 연연도대총관인 흑지상지를 파견해 싸우게 하였다. 그는 산서성 산음현 동북쪽의 황화퇴에서 돌궐군을 대파하고 40여리를 추격하니 그들은 달아나 고비사막 북쪽인 적북으로 사라졌다. 그는 상으로 하사품을 받을때마다 장교와 사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군사들이 실수로 그가 타는 명마를 다치게 하니 장교가 볼기치는 형을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 때문에 관병에게 볼기를 치겠는가?” 그의 도량이 이토록 컸다.

당시는 혹리인 색원례, 내준신, 주흥의 전성시대였다. 그들의 무고와 고문으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흥은 명신인 위현동을 무고해 죽게 만들었다. 이어 우무위대장군 연공 흑지상지가 음양장군 조회절과 더불어 모반을 일으켰다고 무고해 옥에 가두었다. 689년 10월 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무고는 9년 후인 698년 그의 장남 흑치준의 노력으로 해명되었다. 측천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추증하고 공훈과 봉작을 회복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