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 온 와이와 문화 광주
2017년 11월 15일(수) 00:00 가가
박 진 현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헤이 온 와이(Hay on Wye) 책 마을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다. 런던 유스턴 스테이션에서 버밍험행 기차를 타고 2시간을 달리다 다시 해리포드행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종착역인 해리포드역에서 내려 1시간 정도 마을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돌발 변수가 생기면 여정은 더욱 팍팍해진다. 해리포드역에서 헤이온와이를 오가는 버스 노선이 많지 않아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하면 스케줄이 완전 ‘꼬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필자의 경우가 딱 그랬다. 해가 짧아지는 10월 이후부터는 버스 노선이 감축되고 해리포드 역 증축 공사로 버스 승강장이 변경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탓에 정각 11시에 출발하는 헤이 온 와이 버스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다음 버스는 오후 1시30분 출발. 불안한 마음에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후다닥 때운 후 정류장에서 1시간을 꼬박 기다린 끝에 헤이 온 와이행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시골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보니 버스를 놓쳐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한참 동안 달린 버스는 오후 2시30분에 종점인 헤이 온 와이에 닿았다. 런던에서 아침 8시20분 기차를 탔으니 무려 6시간이 넘는 긴 일정이었다. “접근성이 최악인데도 어떻게 글로벌 명소가 됐을까?” 버스를 놓친 순간 품었던 궁금증이 불현듯 떠올랐다.
광산촌, 책 마을로 바뀌다
헤이 온 와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에 자리한 산간 마을이다. 런던에서 자동차로도 5시간 남짓 걸리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광산촌으로 유명했지만 석탄이 바닥나면서 급속히 쇠락했다. 하지만 지난 1961년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 출신의 20대 청년 리차드 부스(Richard Booth·84)가 마을 소방서 건물 한 쪽에 헌책방을 연 후 세계적인 책 마을로 변신했다. 처음엔 산간벽지에 무슨 책방이냐며 부스를 비웃었던 마을 주민들이 런던, 아일랜드, 미국을 돌아다니며 희귀본 고서와 헌책들을 모으는 그의 열정에 감동받아 하나둘씩 빈집에 책방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헤이 온 와이는 900년 전 노르만 왕족인 브라우스 2세가 세운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헌책방이 줄지어 서 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는 헌책과 16∼17세기 고서, 신간 등 100만여 종의 서적이 비치돼 전 세계의 방문객들을 불러들인다. 한창 잘나갈 때는 40여 곳에 달했지만 임대료가 뛰어오르는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현재는 20곳의 서점과 카페, 식당, 아트숍, 빈티지 가게 등이 성업 중이다. 경기도 파주 책 마을이 헤이 온 와이에서 영감을 얻은 것만 봐도 그 명성을 잘 알 수 있다.
지난달 서울 홍대 입구에선 경의선 책 거리 1주년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이 펼쳐졌다. 경의선 책 거리는 지난해 10월 말 마포구청이 홍대 입구 역 6번 출구에서 와우교까지 약 250m 이르는 옛 경의선 철길 자리에 조성한 책 테마 거리다. 책 한 권의 가치를 통해 삶의 지혜를 나누자는 콘셉트로 인근의 동네 서점과 출판사, 카페 등을 연계시켜 관광 코스로 내놓았다. 개장 1년 만에 4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일단 성공적이다.
경의선 책 거리의 최대 수혜자는 주민과 동네 서점들이다. 고즈넉한 책방들을 산책하다 보면 저절로 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가까운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고무된 서울시는 근래 수 십여 개의 책방을 11개의 책방 길로 묶은 ‘책방 산책 서울’을 발간하고 관광 투어를 운영하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광주시 동구에서도 푸른길(옛 경전선 폐선부지) 공원을 책 거리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검토중이다.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푸른길 주변의 헌책방과 동네서점들을 코스로 엮어 색다른 복합 문화 공간을 꾸민다는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 있는 구도심 일대와 인근의 책방, 갤러리, 광주폴리 등 문화자산들을 꿰어 낸다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푸른길 공원을 책 거리로
사실 고즈넉한 책 향기가 숨 쉬는 책 거리는 문화 도시의 품격을 높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 여부다. 책 거리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기 위해선 동네 서점들이 생존하는 여건이 보장돼야 하지만 지금처럼 책을 읽지 않는 문화 속에선 ‘미래’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 도시의 실핏줄인 동네 서점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자체가 지역 서점 활성화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년들이 동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절반을 지원하는 순천시나 공공기관 도서 구매 시 지역 서점의 도서를 우선 구매토록 조례를 제정한 광산구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야흐로 책을 가까이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언제쯤이면 광주에서도 헤이 온 와이나 경의선 책 거리처럼 근사한 문화 공간을 만날 수 있을까?
/jhpark@kwangju.co.kr
차창 밖으로 펼쳐진 시골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를 보니 버스를 놓쳐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한참 동안 달린 버스는 오후 2시30분에 종점인 헤이 온 와이에 닿았다. 런던에서 아침 8시20분 기차를 탔으니 무려 6시간이 넘는 긴 일정이었다. “접근성이 최악인데도 어떻게 글로벌 명소가 됐을까?” 버스를 놓친 순간 품었던 궁금증이 불현듯 떠올랐다.
헤이 온 와이는 900년 전 노르만 왕족인 브라우스 2세가 세운 고성(古城)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헌책방이 줄지어 서 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는 헌책과 16∼17세기 고서, 신간 등 100만여 종의 서적이 비치돼 전 세계의 방문객들을 불러들인다. 한창 잘나갈 때는 40여 곳에 달했지만 임대료가 뛰어오르는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현재는 20곳의 서점과 카페, 식당, 아트숍, 빈티지 가게 등이 성업 중이다. 경기도 파주 책 마을이 헤이 온 와이에서 영감을 얻은 것만 봐도 그 명성을 잘 알 수 있다.
지난달 서울 홍대 입구에선 경의선 책 거리 1주년을 기념하는 페스티벌이 펼쳐졌다. 경의선 책 거리는 지난해 10월 말 마포구청이 홍대 입구 역 6번 출구에서 와우교까지 약 250m 이르는 옛 경의선 철길 자리에 조성한 책 테마 거리다. 책 한 권의 가치를 통해 삶의 지혜를 나누자는 콘셉트로 인근의 동네 서점과 출판사, 카페 등을 연계시켜 관광 코스로 내놓았다. 개장 1년 만에 4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일단 성공적이다.
경의선 책 거리의 최대 수혜자는 주민과 동네 서점들이다. 고즈넉한 책방들을 산책하다 보면 저절로 책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가까운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고무된 서울시는 근래 수 십여 개의 책방을 11개의 책방 길로 묶은 ‘책방 산책 서울’을 발간하고 관광 투어를 운영하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광주시 동구에서도 푸른길(옛 경전선 폐선부지) 공원을 책 거리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검토중이다.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푸른길 주변의 헌책방과 동네서점들을 코스로 엮어 색다른 복합 문화 공간을 꾸민다는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 있는 구도심 일대와 인근의 책방, 갤러리, 광주폴리 등 문화자산들을 꿰어 낸다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푸른길 공원을 책 거리로
사실 고즈넉한 책 향기가 숨 쉬는 책 거리는 문화 도시의 품격을 높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지속 가능성 여부다. 책 거리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기 위해선 동네 서점들이 생존하는 여건이 보장돼야 하지만 지금처럼 책을 읽지 않는 문화 속에선 ‘미래’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 도시의 실핏줄인 동네 서점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자체가 지역 서점 활성화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년들이 동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경우 책값의 절반을 지원하는 순천시나 공공기관 도서 구매 시 지역 서점의 도서를 우선 구매토록 조례를 제정한 광산구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야흐로 책을 가까이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언제쯤이면 광주에서도 헤이 온 와이나 경의선 책 거리처럼 근사한 문화 공간을 만날 수 있을까?
/jhpark@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