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인 조선대 국어교육과교수] 조선대의 역사와 새 희망
2017년 09월 22일(금) 00:00 가가
오는 29일은 조선대가 개교한 지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조선대는 우리나라 200여 개가 넘는 4년제 대학 중 비교적 규모가 큰 종합대학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 설립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헤아려 본다면 조선대는 우리 민족의 근대 고등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한동안 한반도에는 대학(학부)이 없었다. 이에 선각자들이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우리 민간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자는 운동이 그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송진우, 한용운 등 47인이 회동하여 ‘조선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발기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구체화되자 일제는 설립 위원과 회원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 노골적으로 탄압하여 결국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대로 광주로 옮겨왔다. 현준호, 김성수, 김병로, 윤정하 등이 호남은행을 중심으로 음성적으로 추진하였던 ‘호남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당시는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통해 철권통치를 굳혀가는 때여서 구체적인 안조차 이룩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일제는 1924년에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개교한다. 역사상 최초로 한반도에 유일한 학부가 설치된 대학이 일제의 총독부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광복 이전까지의 한반도에서 유일무이한 대학(학부)이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으나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우리 민족의 후예들에게 시급히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욕구가 여기저기서 분출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46년에 일제가 세운 경성제대를 제외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3개의 대학(학부)이 새로이 설립되어 개교한다. ‘국립서울대학교’, ‘김일성대학’ 그리고 ‘조선대학’이 그것이다.
고등교육에 대한 국민의 욕구를 받아들인 미군정 당국은 일제 때부터 있어왔던 기존의 경성제국대학, 경성의전·치전(齒專)·법전(法專), 경성고공(高工), 경성고상(高商), 경성고농(高農)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안’을 발표하고 ‘국립 서울대’를 설립했으나,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1년여 동안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북쪽에서는 종합대학 창립사업이 전 주민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 법령 40호로 발표했다. ‘김일성대학’은 기존에 있던 ‘평양의과전문’과 ‘대동공업전문’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부로 편입시켜서 설립한 것이다.
서울대는 미군정청이, 김일성대학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의 주체였다. 그러나 조선대학은 달랐다. 그 설립주체가 관이 아닌 민간이며, 개인이 아닌 순수한 우리 백성 대중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좌절되었던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이 1946년 4월 광주에서 ‘조선대학설립동지회준비위원회’ 창립으로 부활된 것이다. 이어서 8월에 조선대학설립동지회가 광주서중학교 강당에서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설립동지회는 해방 조국 건설의 신념에 불타는 지식인, 관리, 지주로부터 머슴과 촌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 대중이 참여한 모임이었다.
설립동지회원 자격은 계층, 학력, 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호남지역 전 대중에게 완전 개방되었다. 7만2000여 회원들이 조선대학의 설립에 참여함으로써,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은 그 유례가 없는 규모로 결집되었다. 설립 주체의 대중적 성격과 규모로 인하여 조선대학교는 명실상부한 민립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서울대와 김일성대가 기존의 시설과 조직 등을 통합하여 이룩한 것이라면 조선대는 아무 것도 없는 맨땅에 창립한 새로운 대학이다. 또한 대학 명칭이 ‘광주’, ‘전남’, ‘호남’ 등이 아닌 ‘조선’인 데에도 그 의미가 깊다. 1946년 역사적으로 출발한 세 대학의 개교 날짜는 조선대 9월 29일, 김일성대 10월 1일, 서울대 10월 15일로 조선대가 제일 빨랐다.
요즘 조선대 이사회 문제가 핫이슈가 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조선대가 나아갈 방향은 무너진 설립 정신의 회복이다. 오늘날의 조선대 문제는 온갖 비리로 1988년 물러났던 구경영진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다시 복귀시키면서 야기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대는 임시 이사를 파견하여 구경영진 세력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장차 ‘국민공익형이사제’를 거쳐 궁극적으로 당초 설립주체였던 국민에게 그 경영권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구체화되자 일제는 설립 위원과 회원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 노골적으로 탄압하여 결국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대로 광주로 옮겨왔다. 현준호, 김성수, 김병로, 윤정하 등이 호남은행을 중심으로 음성적으로 추진하였던 ‘호남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그것이다.
고등교육에 대한 국민의 욕구를 받아들인 미군정 당국은 일제 때부터 있어왔던 기존의 경성제국대학, 경성의전·치전(齒專)·법전(法專), 경성고공(高工), 경성고상(高商), 경성고농(高農)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안’을 발표하고 ‘국립 서울대’를 설립했으나,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1년여 동안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북쪽에서는 종합대학 창립사업이 전 주민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 법령 40호로 발표했다. ‘김일성대학’은 기존에 있던 ‘평양의과전문’과 ‘대동공업전문’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부로 편입시켜서 설립한 것이다.
서울대는 미군정청이, 김일성대학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의 주체였다. 그러나 조선대학은 달랐다. 그 설립주체가 관이 아닌 민간이며, 개인이 아닌 순수한 우리 백성 대중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좌절되었던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이 1946년 4월 광주에서 ‘조선대학설립동지회준비위원회’ 창립으로 부활된 것이다. 이어서 8월에 조선대학설립동지회가 광주서중학교 강당에서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설립동지회는 해방 조국 건설의 신념에 불타는 지식인, 관리, 지주로부터 머슴과 촌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 대중이 참여한 모임이었다.
설립동지회원 자격은 계층, 학력, 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호남지역 전 대중에게 완전 개방되었다. 7만2000여 회원들이 조선대학의 설립에 참여함으로써,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은 그 유례가 없는 규모로 결집되었다. 설립 주체의 대중적 성격과 규모로 인하여 조선대학교는 명실상부한 민립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서울대와 김일성대가 기존의 시설과 조직 등을 통합하여 이룩한 것이라면 조선대는 아무 것도 없는 맨땅에 창립한 새로운 대학이다. 또한 대학 명칭이 ‘광주’, ‘전남’, ‘호남’ 등이 아닌 ‘조선’인 데에도 그 의미가 깊다. 1946년 역사적으로 출발한 세 대학의 개교 날짜는 조선대 9월 29일, 김일성대 10월 1일, 서울대 10월 15일로 조선대가 제일 빨랐다.
요즘 조선대 이사회 문제가 핫이슈가 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조선대가 나아갈 방향은 무너진 설립 정신의 회복이다. 오늘날의 조선대 문제는 온갖 비리로 1988년 물러났던 구경영진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다시 복귀시키면서 야기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대는 임시 이사를 파견하여 구경영진 세력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장차 ‘국민공익형이사제’를 거쳐 궁극적으로 당초 설립주체였던 국민에게 그 경영권을 되돌려 주는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