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전남은 수묵으로 물들고 있다. 지난 8월 30일 개막해 오는 31일까지 이어지는 제4회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문명의 이웃들’을 주제로 수묵의 고정관념을 깨는 다채로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해남에서 진도를 거쳐 목포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가면 뿌리에서 줄기, 세계화로 확장되는 수묵의 길을 만날 수 있다.
◇‘뿌리의 재발견’ 해남
해남에서 시작된 수묵 여정은 ‘옛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단숨에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남도의 뿌리 깊은 수묵 정신과 동시대 미술로 확장되는 현재의 흐름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특히 도슨트 해설을 통해 작품 속 숨은 맥락과 이야기를 곱씹으며 전시를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6관 고산윤선도박물관은 ‘최고의 수묵 거장전’이라는 이름처럼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 등 조선 지성들의 수묵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공간이다.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의 자화상은 국보로 지정된 걸작이다.
정면을 꿰뚫는 듯한 시선, 얼굴만 붕 떠 있는 기이한 구도는 300년 전 화가의 자기 성찰을 지금도 생생하게 전한다.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강렬한 응시성은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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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윤선도박물관 ‘최고의 수묵 거장전 : 공재, 겸재를 만나다!’ 전의 윤두서 자화상 영인본. 바로 뒤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걸려있다. /최현배 기자 |
맞은편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걸려 있다. 비갠 인왕산의 물안개와 햇살, 빗물에 젖은 암벽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 진경산수화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다. 이곳은 내면을 향한 시선과 자연을 향한 시선이 교차하는 흑백의 공간으로, 어둠 속에서 오직 수묵만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전시였다. 두 작품 모두 영인본이지만, 박물관내 윤두서의 ‘세마도’ 진본이 그 아쉬움을 메운다. 이번 비엔날레를 맞아 321년 만에 수장고를 나와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을 더했다.
5관 땅끝순례문학관의 주제는 ‘사군자의 숨결, 동시대 미술로 이어지다’. 다산 정약용의 간찰에서 출발해 동서양 현대 작가들의 실험적 수묵까지 아우르는 전시의 범위와 깊이가 인상적이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글은 학문과 교류, 고단한 삶의 고백이 스며있는 개인적 기록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도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목소리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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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순례문학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최현배 기자 |
구성연 작가는 버려진 플라스틱 조각을 난초의 형상으로 바꿔 표현했다. 멀리서 보면 고귀한 난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글자가 새겨진 플라스틱 조각들이 드러난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플라스틱이 수묵의 여백 속에서 난초로 되살아난 모습은 수묵이 환경 문제까지 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는 윤두서의 ‘말타는 자화상’과 겸재 정선의 그림을 오마주하며 동양 수묵을 유럽 현대미술 언어로 재해석했다. 일본 작가 린타로 하시구치는 섬 생활의 고립감을 담아낸 힘 있는 잉크 드로잉을 선보이며 먹 선의 리듬감을 강렬하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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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관 땅끝순례문학관에 전시된 김환기 작 ‘무제’와 이헌정 작가의 항아리. /최현배 기자 |
김환기의 1966년 추상화 ‘무제’는 점 하나하나가 우주처럼 확장되는 전면점화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바로 아래 전시된 이헌정의 도자는 우연한 찌그러짐조차 예술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홍푸르메 작가의 설치 작품 ‘심향각’은 관람객이 직접 꽃을 꽂고 향을 맡으며 체험하는 공간으로 수묵을 ‘보는’ 예술에서 ‘느끼는’ 예술로 확장시켰다. 폭포를 연상시키는 비백(飛白) 기법의 선,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글귀, 두루미에서 영감을 얻은 오브제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은 전통 수묵의 철학이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줄기의 확장’ 진도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의 두 번째 여정은 ‘수묵의 줄기’를 보여주는 진도 전시관이다. 해남이 수묵의 뿌리를 확인하는 자리라면 진도는 그 뿌리에서 뻗어나온 줄기처럼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으로 확장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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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4관 소전미술관에 전시된 문자예술. /최현배 기자 |
4관 소전미술관은 ‘수묵의 확장: 여백의 미와 실험성’이라는 주제로 추사 김정희에서 시작해 한국 서예의 계보를 짚어낸다. 추사체의 힘과 절제, 석파 이하응의 난초, 소전 손재형의 소전체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단순한 글씨의 전시를 넘어 수묵이 지닌 조형성과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철농 이기우는 전각을 독립된 예술로 확립하며 글씨와 도장의 경계를 허물었고 학정 이돈흥은 호남 서단의 맥을 잇는 단정한 필치로 여백의 울림을 남겼다. 목인 전종주는 서체 추상을 통해 문인화의 자유를 실험했고, 석재 서병오와 검여 유희강은 각기 다른 시대의 격랑 속에서 서예를 예술이자 삶의 태도로 확장시켰다.
3관 남도전통미술관 전시 주제는 ‘색으로 다시, 먹을 말하다?고암에서 소정까지’. 한국 현대 수묵사의 다섯 거장의 작품을 통해 수묵의 농담에 색채가 스며든 풍경,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순간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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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전통미술관에 전시된 고암 이응로의 ‘군상’. /최현배 기자 |
이응노의 대표작 ‘군상’ 앞에서는 발길을 멈춘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았다. 화면 가득 이어지는 반복적 획은 개별 인물과 군중의 흐름을 형상화 한 작품이다. 겹겹이 쌓인 몸짓과 흐름 속에서 분단과 이산, 억압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군중의 힘과 인간 존재의 본질이 새겨진다. 오랫동안 그림 앞에서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은 작품이 지닌 압도적 에너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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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3관 남도전통미술관에 전시된 남천 송수남 작가의 ‘붓의 놀림’. /최현배 기자 |
내고 박생광의 작품에서는 강렬한 오방색이 화면을 지배한다. 탈과 무속, 신화와 역사를 수묵의 선과 색으로 압축해낸 작가의 화풍은 수묵이 흑백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뜨린다. 산정 서세옥은 여백과 선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했다. 단순한 획 하나, 점 하나에도 호흡과 리듬이 배어 있어 고요한 화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남천 송수남은 산수화의 틀 위에서 반복되는 붓질로 질서와 리듬을 쌓아 올리며 수묵의 현대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소정 황창배는 ‘무제’ 연작을 통해 과감한 색채 실험과 자유로운 형식으로 한국 수묵화의 전통을 갱신하며 새로운 조형 언어를 제시했다.
◇‘수묵의 세계화’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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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 35명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목포 실내체육관 전시장. /최현배 기자 |
비엔날레 투어의 마지막인 목포는 규모에서 압도했다. 문화예술회관과 실내체육관 두 곳을 전시장으로 꾸린 목포는 20개국 63명의 작가가 참여한 대규모 무대였다. 해남이 수묵의 뿌리를, 진도가 줄기를 보여주었다면, 목포는 수묵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나팔관이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회화와 미디어가 역동적으로 연결되며 ‘수묵의 세계화’를 실감케 했다.
2관 실내체육관 전시는 ‘스타벅스에서 산수화까지’라는 주제처럼 과감했다. 일상의 키워드와 데이터, 전통 산수화가 한 화면 안에 뒤섞이며 수묵의 동시대적 가치를 탐색했다. 동양이 아닌 낯선 문화권의 시선이 덧입혀지면서 세계적 언어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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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문화예술회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 작가의 ‘쓰인방’. /최현배 기자 |
폴란드 출신의 프셰미스와프 야시엘스키는 수묵을 단순한 회화의 기법이 아닌, 생각을 표현하고 질문을 던지는 도구로 사용했다. 국내 작가 손부남의 작업도 주목을 끌었다. 전통의 먹과 붓, 종이를 유지하면서도 데이터와 설치적 요소를 가미해 수묵이 오늘날 어떤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지민석 작가의 글로벌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와 ‘산수화’가 한 화폭 안에 공존하는 풍경에 관람객들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1관 문화예술회관의 주제는 ‘수묵의 확장, 감각의 전환’. 관객과 교감하는 작품과 미디어 영상 작품들이 중심이 되어 익숙한 감각을 깨트리고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는 작품들이 펼쳐졌다. 영상이 벽을 가득 채우고 관람객의 몸짓에 따라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설치가 이어졌다.
<> 이란 출신 작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의 설치작품 ‘Written Room(쓰인 방)’은 눈에 띄는 장면을 만들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공간에는 벽과 바닥, 천장 가득 페르시아 알파벳이 춤을 추듯 그려져 있다. 작가가 14일간 현장에 머물며 전시장 내부 벽면에 드로잉 형식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함평 출신 윤준영 작가의 ‘불확실한 믿음’ 시리즈도 눈에 띈다. 한지와 먹을 바탕으로 하지만 화면 속 풍경은 전통 산수가 아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빌딩, 기하학적 구조물이 얽혀 있는 모습은 현대인의 불안이나 믿음의 경계를 표현하고 있다.
/글=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