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명분 김밥 노쇼 사기 막은 자영업자들의 뭉클한 ‘연대쇼’
2025년 12월 15일(월) 20:30
분식집 사장, 광주 단체대화방에 피해 사실 알리자
시민·상인들 앞다퉈 구매 완판

지난 14일 박찬규(33)씨가 노쇼 사기로 준비된 김밥 150인분의 기부처를 찾기 위해 광주 지역 자영업자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를 남긴 모습.

“아, 이게 노쇼(No-show·예약을 하고도 사전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 행위) 사기구나. 황당하고 화도 많이 났지만, 많은 사장님이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셔서 다행히 ‘완판’할 수 있었어요.”

광주시 북구 문흥동 일대에서 김밥 150줄 ‘노쇼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주변 자영업자들의 ‘연대’로 큰 손해를 면했다는 사연이 전해졌다.

15일 광주시 북구 문흥동의 분식집에서 점심 장사를 마친 자영업자 박찬규(33)씨는 “4년간 장사를 해왔지만 ‘노쇼’ 사기를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박씨의 가게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지난 14일 오후 5시께였다. 중후한 목소리의 한 남성은 자신을 지역 복지기관 관계자라고 소개하며 “2시간 반 뒤 찾으러 가겠다”고 김밥 150줄을 주문했다.

저녁 시간을 앞둔 가게는 주문이 밀리고 손님들로 붐볐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박씨는 아이들을 위한 행사에 사용될 것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조리에 나섰다.

그는 “직원들만으로 감당이 안 돼 어머니까지 일손을 도우러 오셨다”며 “다음날 장사를 위한 재료 준비도 해야 했는데 시간을 맞추느라 단체 주문에만 꼬박 2시간을 매달렸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약속된 시간에 김밥을 완성해 놓았지만, 주문자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씨가 휴대전화로 20통 넘게 전화를 걸어봐도 돌아오는 것은 ‘통화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의 문자뿐이었다. 박씨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그는 “개당 3500원짜리 김밥을 모두 폐기해야 할 상황이 됐다”며 “얼마 전 체육단체를 사칭한 주문이 있었지만 그때는 선결제를 유도해 걸러냈다. 복지기관이라고 하니 믿었던 것이 실수였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체념한 박씨는 경찰에 노쇼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평소 기념일마다 복지시설에 음식을 무료로 전달해왔던 그는 김밥을 모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기부처를 찾기 위해 지역 자영업자 익명 단체대화방과 동네 커뮤니티에 사연을 알렸다. 그러자 “직원과 가족들의 야식으로 구매하고 싶다”는 자영업자들의 연락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는 “가까운 상인들은 물론이고 먼 지역에서도 상인과 시민들이 찾아와 김밥을 사 갔다”며 “상인들은 ‘어려운 시기에 이런 피해를 당해 얼마나 속상하겠느냐’거나 어떤 마음일지 십분 이해한다’며 격려와 위로를 건넸다”고 말했다.

이어 “너무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컸다”며 “이미 기부하려던 음식이었고 만들어진 김밥을 제값에 팔 수 없다고 생각해 개당 2000원에 판매했는데 일부 상인들이 돈을 더 쥐여주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미소를 지었다.

박씨의 가게에는 30여명의 시민과 상인들이 다녀갔으며 각자 적게는 1~2줄, 많게는 20줄씩 김밥을 구매한 것으로 전해졌다. 글을 올린 지 2시간여만에 준비된 김밥은 모두 동이 났다. 그럼에도 구매 전화와 방문 문의는 밤이 깊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는 “완판 이후 전화 주신 분들은 정중히 사양했고 직접 찾아온 분들께는 새로 김밥을 만들어 할인가에 판매했다”며 “노쇼 피해로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따뜻해진 하루였다”고 말했다.

이어 “못 다한 장사 준비를 하느라 새벽 3시까지 일해야 했지만, 몸은 오히려 홀가분했다”며 “장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지역민, 상인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고물가·고금리 등 불경기가 이어지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영업자들을 울리는 노쇼 사기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영업자가 스스로 조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사를 하다 보면 피해를 완전히 막기는 어렵다”며 “노쇼 피해는 금전적 손실을 넘어 자영업자들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는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광주북부경찰은 박씨의 가게 외에도 동일인으로부터 같은 수법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주문자는 같은 시간 각화동의 한 가게에도 복지기관 관계자를 사칭해 김밥 150줄을 단체 주문한 뒤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복지기관은 이와 관련해 단체 주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휴대전화 사용 내역 등을 토대로 주문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한편,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1월까지 광주 지역에서 발생한 노쇼 사기 피해는 총 96건, 피해액은 15억여원에 달한다.

/윤준명 기자 yoon@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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