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유배의 길에서 정약용의 정신을 만나다
2026년 02월 22일(일) 17:00 가가
강진은 조선의 천재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18년 유배세월을 견뎌낸 인고의 땅이다. 유배 초기 흩어진 마음을 다잡았던 사의재(四宜齋)를 지나 실학의 정수를 꽃피운 다산초당에 이르기까지 절망의 끝에서도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다산의 발자취는 강진 땅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겨우내 선명한 붉은빛 동백을 틔워낼 백련사 숲과 은빛 갈대 물결이 일렁이는 강진만 생태공원, 그리고 바다 위 비경을 품은 가우도까지.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교차하는 2월, 다산의 숨결과 낭만이 머무는 강진으로 떠나보자.
◇사의재,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이 보다 잘 살게 하려 힘썼던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다. 천재적 학식과 행정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과학, 사회, 의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정약용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을 설계했으며 서양 기술력을 도입한 거중기를 발명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크게 절감시켰다. 또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연결한 ‘배다리’를 설계했다.
남인 계열의 학자였던 정약용을 파격 중용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남인 세력 제거를 위한 숙청을 단행한다. 1801년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사건인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됐다.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체포돼 경기도로 유배 보내졌다.
이후 정약용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외국 군대를 동원해 천주교 신앙 자유를 얻으려했던 ‘백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약용은 서울로 압송 후 강진으로 보내졌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강진 유배 후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을 오가며 8년을 보냈고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解配)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간 다산초당에 머물렀다.
강진 읍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사의재(四宜齋)가 발길을 잡는다. 유배된 정약용이 처음 짐을 푼 곳이다. 동문 밖 주막집의 골방한 칸, 다산은 이곳에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의재라는 이름에는 생각을 맑게 할 것, 용모는 단정하게 할 것, 말은 적고 신중하게 할 것, 행동은 무겁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다산이 유배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학문과 인격 수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복원된 사의재 초가집 마당에는 겨울 햇살이 내려앉아 있고 다산이 마셨을 우물가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 적막함이 감돈다. 주막 할머니의 배려로 겨우 몸을 뉘었던 그 좁은 방에서 조선의 천재는 절망을 딛고 학문의 기초를 다시 세웠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며 ‘경세유표’의 초안을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의재에서 정약용은 어린이들을 위한 한자 학습서 ‘아학편’을 저술했다. 책에는 실용적인 교육관이 담겨있다. 또 주역 등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작하며 ‘다산학’ 학문 체계의 서막을 열었다. 주막집 아들인 황상 등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사의재를 나와 만덕산 기슭으로 향하면 다산초당에 닿는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한때 ‘뿌리의 길’이라 불렸다. 수백 년 된 소나무와 차나무 뿌리가 땅 위로 얽히고설켜 뿌리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흙이 씻겨 내려간 자리에 드러난 뿌리들은 마치 다산이 겪었던 고초와 인내의 시간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소나무 뿌리가 튀어나오고, 바위가 많은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숨이 찼다. 최근에는 안전을 위해 계단으로 정비됐지만 그 길이 품고 있던 의미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산 중턱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다산이 직접 쓴 ‘정석(丁石)’ 자가 새겨진 바위와 마주한다.
자신의 성인 ‘정’자를 새겨 넣은 이 바위는 유배객으로서의 정체성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상징한다. 정약용은 뒷산에 차나무가 많아 차 다(茶)자를 사용해 자신의 호에 다산이라 이름 붙였다. 다산이 직접 판 샘물 ‘약천’도 있다. 다산은 이 물을 마시며 건강을 돌보고 차를 끓이는 물로 사용했다.
다산초당 툇마루에 앉으면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머물며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마당 한편의 다조는 다산이 차를 끓이던 바위다 .
다산초당은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 중 가장 찬란한 결실을 맺은 장소다. 10여년간 다산이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이곳은 다산에게 학문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
다산초당의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지만 1936년 노후로 붕괴돼 없어졌고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목조와가로 중건했다. 현판에 판각돼 있는 ‘다산초당’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한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매진했다. 18명의 제자로 구성된 다산학단은 다산의 지휘 아래 방대한 자료를 수집, 분류했다.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써내려간 과정에는 제자들의 헌신적 뒷받침이 있었다.
사의재 시절이 기초를 닦는 시기였다면 다산초당에서 머물던 시절은 국가 제도 개혁안, 형법, 농업, 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용적 학문 체계를 완성한 시기다.
초당 옆에는 다산이 주로 거처하며 저술에 몰두하던 동암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0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쌓아두고 매일 글을 썼다. 또 다른 공간인 서암은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밤낮으로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산은 거처뿐 아니라 유배지 곳곳에서 지역 인사들과 소통하며 영향을 끼쳤다.
◇명발당·다산박물관
도암면의 ‘명발당’은 전남도 민속유산으로 지정된 해남윤씨 향촌파의 종택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다산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남 윤씨 가문의 지원이 있었다. 다산은 외가인 해남 연동을 오가는 길에 해남윤씨 윤광택의 별장을 방문했으며 그 인연으로 강진 유배 기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는 사촌동생 윤시유를 통해 유배 중인 다산을 지원했다. 또 장남 윤창모를 다산초당으로 보내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이러한 인연은 혼인으로도 이어졌다.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가 이곳에서 혼인했다. 다산은 다산초당 동암에서 부인 홍씨가 보내온 빛바랜 붉은 치마를 잘라 그림을 그려 딸에게 보냈다. 활짝 핀 매화 가지에 새 한 쌍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이 ‘매조도’다.
인근 다산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애와 철학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구성 한 전시를 통해 유배지에서 꽃피운 실학의 정수를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방대한 학문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다산초당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다산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 생활, 유배 과정과 해배 이후의 삶을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몰입형 영상관에서는 다산의 유배 여정과 철학을 대형 스크린 속 화려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분야별로 정리한 다산의 정수도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산의 부인 홍씨가 낡은 치마에 아들을 향한 훈계를 적은 서첩인 ‘하피첩’도 이곳에 있다. 가족에 대한 다산의 지극한 사랑과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의 대표 유물이다. 박물관에는 다산 정약용이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그린 ‘매조도’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다산의 영정과 생애 기록을 담은 유물 자료도 함께 비치했다. 체험 프로그램은 다산의 친필을 써보는 붓글씨 체험과 다도 체험으로 구성돼 있다. 내부에는 다산 관련 서적을 비치해 방문객이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했다.
박물관 외부 산책로는 다산초당으로 연결된다. 산길을 따라 약 15분간 도보로 이동하면 다산초당과 만덕산 지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외쳤던 부정부패 척결, 민본주의 사상, 실질적 복지 정책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행정학적 관점에서도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2년 유네스코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천한 인물로 공인하기도 했다.
/김다인·남철희 기자 kdi@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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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유배된 후 가장 먼저 짐을 풀었던 사의재. |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이 보다 잘 살게 하려 힘썼던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다. 천재적 학식과 행정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과학, 사회, 의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정약용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외국 군대를 동원해 천주교 신앙 자유를 얻으려했던 ‘백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약용은 서울로 압송 후 강진으로 보내졌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강진 유배 후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을 오가며 8년을 보냈고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解配)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간 다산초당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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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의재 초가집 마당에 세워진 주막 할머니 동상. |
복원된 사의재 초가집 마당에는 겨울 햇살이 내려앉아 있고 다산이 마셨을 우물가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 적막함이 감돈다. 주막 할머니의 배려로 겨우 몸을 뉘었던 그 좁은 방에서 조선의 천재는 절망을 딛고 학문의 기초를 다시 세웠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며 ‘경세유표’의 초안을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의재에서 정약용은 어린이들을 위한 한자 학습서 ‘아학편’을 저술했다. 책에는 실용적인 교육관이 담겨있다. 또 주역 등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작하며 ‘다산학’ 학문 체계의 서막을 열었다. 주막집 아들인 황상 등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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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 가는 길. ‘뿌리의 길’로 불렸던 곳이 최근 계단 형태로 정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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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직접 쓴 정석 자가 새겨진 바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상징한다. |
다산초당 툇마루에 앉으면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머물며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마당 한편의 다조는 다산이 차를 끓이던 바위다 .
다산초당은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 중 가장 찬란한 결실을 맺은 장소다. 10여년간 다산이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이곳은 다산에게 학문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
다산초당의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지만 1936년 노후로 붕괴돼 없어졌고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목조와가로 중건했다. 현판에 판각돼 있는 ‘다산초당’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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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이 유배 기간 많은 저서를 써내렸던 다산초당. |
사의재 시절이 기초를 닦는 시기였다면 다산초당에서 머물던 시절은 국가 제도 개혁안, 형법, 농업, 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용적 학문 체계를 완성한 시기다.
초당 옆에는 다산이 주로 거처하며 저술에 몰두하던 동암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0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쌓아두고 매일 글을 썼다. 또 다른 공간인 서암은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밤낮으로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산은 거처뿐 아니라 유배지 곳곳에서 지역 인사들과 소통하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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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남 윤씨 가문의 지원이 있었다. 해남 윤씨 향촌파의 종택인 명발당. |
도암면의 ‘명발당’은 전남도 민속유산으로 지정된 해남윤씨 향촌파의 종택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다산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남 윤씨 가문의 지원이 있었다. 다산은 외가인 해남 연동을 오가는 길에 해남윤씨 윤광택의 별장을 방문했으며 그 인연으로 강진 유배 기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는 사촌동생 윤시유를 통해 유배 중인 다산을 지원했다. 또 장남 윤창모를 다산초당으로 보내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이러한 인연은 혼인으로도 이어졌다.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가 이곳에서 혼인했다. 다산은 다산초당 동암에서 부인 홍씨가 보내온 빛바랜 붉은 치마를 잘라 그림을 그려 딸에게 보냈다. 활짝 핀 매화 가지에 새 한 쌍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이 ‘매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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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박물관 로비.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모습이 전시돼 있다. |
상설전시실에서는 다산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 생활, 유배 과정과 해배 이후의 삶을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몰입형 영상관에서는 다산의 유배 여정과 철학을 대형 스크린 속 화려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분야별로 정리한 다산의 정수도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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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박물관에는 다산의 친필 글씨, 초상화, 제자들을 가르치며 사용했던 물품 등이 전시돼 있다. |
박물관 외부 산책로는 다산초당으로 연결된다. 산길을 따라 약 15분간 도보로 이동하면 다산초당과 만덕산 지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외쳤던 부정부패 척결, 민본주의 사상, 실질적 복지 정책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행정학적 관점에서도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2년 유네스코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천한 인물로 공인하기도 했다.
/김다인·남철희 기자 kdi@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