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찾아서] ③ 카사노바는 바람둥이인가, 자유인인가?
부도덕 감추려 계몽주의자인 척 … 카사노바, 넉살도 좋네
2017년 05월 18일(목) 00:00

베네치아 최고 지도자인 도제들의 공식 거처였던 두칼레 궁전(우측 건물)은 유럽의 고딕양식과 동방의 양식이 결합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베네치아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게 쫓긴 이탈리아 북쪽의 롬바르디아(밀라노)의 피난민이 바닷가에 마을을 만든 데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 베네치아 사람들은 개펄에서 조개나 캐고 고기를 잡아 연명했는데 곧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이 되고 만다. 물론 기원전에도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는 베네치아에 살던 에네토이족의 미개한 풍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마다 매년 한 번씩 다음과 같은 행사(처녀매매)가 열렸다. 시집 갈 나이가 된 처녀들이 소집되어 전부 한곳에 모여 앉으면 남자들이 그녀들을 에워쌌다. 그러면 전령이 처녀들을 한 명씩 일으켜 세워 경매에 붙였다. 경매는 가장 예쁜 처녀부터 시작되는데, 그 처녀가 높은 값에 팔리면 그 다음으로 예쁜 처녀를 경매에 붙였다. 처녀들은 노예가 아니라 아내로서 팔렸다. 장가들고 싶은 바빌론 남자들 가운데 부자들은 젊고 예쁜 처녀를 사려고 서로 더 높은 값을 제시했다. 그러나 장가들기를 원하는 하층민은 미색을 따지지 않고 못생긴 처녀를 아내로 얻고 돈까지 덤으로 받았다.’

처녀는 마을의 공공재나 다름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자기 딸을 마음대로 시집보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노예제도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남녀 간의 합의를 보장하는 보증인이 있고, 남녀 간에 동거할 의사가 없으면 돈을 돌려주고 헤어질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여성의 인권은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헤로도토스(기원전 485년경 출생)조차 처녀매매를 아름다운 관습이었다고 평하는 것을 보면 남성의 야만과 성매매의 역사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매매야말로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행은 산마르코광장을 벗어나 바로 옆에 있는 두칼레 궁전으로 간다.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를 다스렸던 120명에 이르는 도제들의 공식거처였다고 해서 ‘도제의 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이 궁전 역시 산마르코대성당과 같이 9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4,5세기에 완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흰색과 분홍빛 대리석으로 장식된 궁전은 지붕이 뾰족뾰족한 고딕양식에다 동방의 양식이 어우러져 ‘베네치아 고딕’이라고도 하는데, 회랑을 따라 직립한 36개의 기둥들이 기하학적인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거기에다 기둥 사이의 아치와 섬세한 조각들은 화려한 멋을 보태고 있다. 고딕의 신적인 장중함과 동방의 인간적인 간절함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궁전 내부는 도제의 방과 접견실, 투표실, 재판정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재판을 담당했던 ‘10인 평의회의 방’. 베네치아 출신의 틴토레토(1518-1594)의 작품 ‘천국’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인데 가로가 24.65m, 세로가 7.45m나 된다. ‘10인 평의회의 방’의 뒤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만큼 대형작품인 것이다. 불화의 비천(飛天)과 기독교 성화의 천사를 비교해 보니 하늘을 나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천녀인 비천은 하늘 옷(天衣)을 입었으므로 날 수 있고, 천사는 두 개의 날개로 날고 있다는 점이다.

두칼레 궁전 재판정에서 수로 건너편 건물로 가는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는 석조 덮개가 있는데 수로 건너편 건물은 베네치아의 감옥이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호색가 카사노바도 죄수가 되어 건넜다가 탈옥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다리이다. 다리에는 창이 두 개만 나 있다. 죄수들이 베네치아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창이란다. 죄수들은 한숨을 쉬며 저 짧고 좁은 다리를 느릿느릿 건넜을 터. 그래서 ‘탄식의 다리’가 됐다는데 베네치아에 온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다리이름을 그렇게 부른 데서 연유했다고도 전해진다.

관광객들이 ‘탄식의 다리’를 가깝게 보기 위해 곤돌라를 타고 지나친다. 나는 다리 하단에 조각된 사람얼굴에 흥미를 느끼고 카메라 줌을 당겨본다. 다리덮개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클로즈업시켜 얼굴의 표정들을 살핀다. 기쁜 표정은 없다. 다리 한가운데는 사자머리가 있고 하나같이 무덤덤하거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리를 설계한 필리포 칼레다리오는 반역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335년에 처형됐다고 한다.

카사노바(1725-1798). 그의 원래 이름은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데 세인갈트’이다. 긴 이름만큼 그는 오랫동안 방랑했고, 가는 데마다 온갖 염문을 뿌렸다. 그의 자서전에는 100명이 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모녀, 자매, 수녀 등 다양한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데 카사노바는 단 한 명의 여성도 임신을 시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개발한 피임법 때문이었다. 여인들은 왜 카사노바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을까? 잘생긴 그의 외모, 여성을 대하는 태도, 성적 능력 그리고 그의 천재적인 박학다식이 매력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천재성은 생전 직업이 말해준다. 법학박사, 소설가, 철학자, 사제, 바이올리니스트, 연극배우, 도박꾼, 외교관 등 수십 가지가 넘는다. 내가 보기에도 우월한 유전인자를 가진 남성임에 틀림없다. 특히 내가 부러운 것은 그의 외국어 능력이다.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영어와 스페인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관능의 쾌락을 숨기는 것은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즐기는 것을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는 ’여성을 위해 태어났다고 자각한 나는 언제나 여자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여성들로부터 사랑받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위선적인 남성들에게 질린 여성들이 그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석한 카사노바는 뒷사람들이 자신을 호색가로만 평가할 것을 염려해서인지 자서전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여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며 자신의 부도덕을 감추고자 넉살좋게 당시 유럽에서 풍미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로 변장하려 했던 것이다.

‘탄식의 다리’에 잠시 서 있는 동안 문득 젊음과 반항의 상징인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1788-1824)이 떠오른다. 동성애, 가학, 근친상간 등 온갖 세평에 시달리다가 “나에 대한 세평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맞지 않는 인간이고, 틀리다면 영국이 나에게 맞지 않는 나라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바이런은 1816년 4월 25일에 영국을 떠난다. 큰 명성과 오명을 모두 얻은 그의 나이는 그때 28세였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다가 드디어 카사노바가 살았던 베네치아로 온다. 카사노바와 바이런의 공통점은 조각상 같은 외모. 바이런을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에서만 200여 명의 여성과 사귀었다고 하니 결코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상냥한 카사노바와 달리 바이런은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더구나 한쪽 다리가 짧은 절름발이였지만 여성들은 왜 그를 좋아했던 것일까. 낭만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시도 한몫을 했을 것 같다. 그의 시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를 두런거려 본다.

이렇게 밤 이슥토록/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마음 아직 사랑에 불타고/ 달빛 아직 밝게 빛나고 있지만./ 칼날은 칼집을 닳게 하고/ 영혼은 가슴을 해어지게 하는 것이니/ 마음도 숨 돌리기 위해 멈춤이 있어야 하고/ 사랑 자체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리./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달빛을 받으며.

마음은 아직 사랑에 불타고,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찬탄한 바이런도 결국 그리스에서 방랑을 멈추고 죽는다. 생각나는 대로 쓰기만 하면 시가 되었다는 바이런. “나는 절대로 글을 고쳐 쓰지 않는다.”라고 말한 그의 시가 갖는 매력은 바로 꽂히는 직구 같은 단순함과 날것의 활발발(活發發)함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바이런 같은 시인이 있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모교 은사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은 제자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시가 되었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시인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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