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죽도 못 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2025년 12월 29일(월) 00:00
농산물품질관리사
사철 다양한 죽 인기…따뜻한 정 나누던 풍습 이어지길
옛 어른들이 없이 살던 시절 하는 이야기 속에 꼭 등장하는 음식이 있다. 피죽이다. 옛날 가뭄이 심해 벼농사를 망쳐 먹을 것이 없을 때 피 이삭을 훑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힘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피죽을 먹어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만나기 어렵고, 피죽이란 말은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관습적 표현으로만 남아 있다.

궁핍한 삶에 생존을 위해 먹었던 죽을 요즘 사람들은 사시사철 즐긴다. 겨울을 대표하는 죽이 동지에 먹는 동지죽 즉 팥죽이다. 동짓날에 찹쌀 새알심을 넣고 쑤어 먹는 죽인데 액을 막고 잡귀를 쫓는다고 해 대문에도 뿌렸다. 또 좋은 기운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팥죽을 나눠 먹었는데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전통을 실천하는 먹거리 나눔이라 하겠다. 팥이 붉은색이라 액운을 물리치고 새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절기 음식이지만 영양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효능을 가졌다. 팥의 단백질·식이섬유·칼륨과 비타민 B1, 폴리페놀·사포닌 등 항산화 성분을 바탕으로 영양이 풍부한 겨울 보양식이다.

겨울 간식으로 먹는 호박죽 역시 선조들이 즐겨 먹던 죽이다. 황금색의 늙은 호박은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 양식이기도 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제철을 맞는 늙은 호박은 타임지가 선정한 10대 건강식에 오를 만큼 뛰어난 효능을 자랑한다.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떠오른다. 예로부터 부기를 빼는 데 탁월하다 해 산모들이 산후조리 음식으로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고혈압 예방,폐암 예방, 눈 건강, 항암 효과 등 체내의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인체의 면역기능을 높여주는 슈퍼푸드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먹던 녹두죽도 인기가 좋았다. 녹두죽은 단백질, 비타민 B와 C, 철분 등 풍부한 영양소를 포함하고 있어 체력과 피로 해소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소화가 잘되어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다이어트 식단으로도 적합하고 특히 여름철 무더위로 지친 몸을 보양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깨죽도 뺄 순 없다. 깨와 쌀을 섞어서 끓인 죽으로 향미가 독특하고 열량이 높으며 소화가 잘 돼 보양음식으로 많이 쓰였다. 검은깨 즉 흑임자(黑荏子)로 쑨 흑임자죽을 최고로 쳤는데 자릿조반(아침 일어난 자리에서 바로 먹는 음식)용으로 적합하고 병후 회복기 보양식으로 좋다. 특히 항산화·불포화지방산·미네랄이 풍부해 노화·심혈관·뼈·소화·피부·모발 건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한 맛이 일품인 땅콩죽도 별미다. 땅콩은 비타민B와 단백질이 풍부해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을 대표 보양식이다.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해 피를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도와 동맥경화와 각종 심장질환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심심풀이 땅콩’이란 말처럼 흔히 주전부리로 즐기지만, 휜죽에 섞어서 끓이면 빈속을 채워주는 든든한 끼니가 된다.

‘죽도 밥도 안된다’라는 말도 있듯이 죽은 만들기 굉장히 까다로운 음식중 하나다. 죽 한 그릇을 끓이려면 적잖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쌀도 미리 불려야 하고 육수도 따로 준비해야 한다. 그뿐인가 냄비 바닥에 쌀알이 눌어붙지 않도록 끓이는 동안 계속 휘저어주는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요사이 다양한 밀키트 상품이 판매되고 있어 이것을 섞어 물을 부어 끓이기만 해도 간편하게 죽을 만들 수 있다. 이왕이면 우리 땅에서 나는 진짜배기로 즉석에서 재료를 갈아 끓여 이웃과 나눠 먹자. 이제 우리도 피죽 대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영양 만점의 죽 요리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살지 않는가.

/김대성 기자 big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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