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 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김진섭 작 ‘백설부(白雪賦)’ 중에서〉

지난 주말, 모처럼 펄펄 눈 날리는 거리를 걸으면서 경건한 눈 마중으로 흰 눈을 예찬한 산문 ‘백설부’를 떠올렸다. 동심이 사라져서인지, 흰 눈이 내려도 이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 조금 서글퍼진다. 어쩌면 무뎌진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출퇴근길을 걱정하는 회사형 인간으로 진화되어서였을까? 올겨울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아 무언가 어정쩡해 자꾸 뒤돌아보는 것을 보면 내심 흰 눈을 기다리기는 했던 것 같다.

양나희 작가(1982∼ )의 작품 ‘삶-풍경’(2015년 작)은 꼭 이맘때의 설경을 묘사한 듯하다. 입춘 지난 백설은 잠시의 볕뉘에도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 퇴락한 산동네 집이란 집은 모두 꿈속에 잠긴 듯하고, 옥상과 마당,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지붕 위 잔설이 그지없이 정겹다.

양나희 작가의 풍경은 단순한 회화라기보다 골판지와 채색으로 완성한 반입체적인 작품이다. 캔버스에 스케치를 하고 골판지로 모양을 떠서 오려낸 다음 벽과 지붕 담장 마을길을 이어가면서 그린 ‘마음그림’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 붙박이로 살았던 순천 인제동의 한 풍경일 수도 있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옮겨 왔던 광주의 여러 동네들의 조합 같기도 하다.

작가는 “고향에서 보내준 엄마의 택배상자를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작업의 재료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택배를 받았을 때의 반가움이 잦아들면 이후 누군가에게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계 수단이지만 작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작업의 재료이자 영감의 원천, 삶을 표현할 언어가 된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