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룡 시인·문학들 발행인] 길고 끈적끈적한 ‘검은 리본’
2016년 12월 05일(월) 00:00 가가
글쓰기가 참 어려운 시절이다. 읽는 것도 힘들다. 서점에서는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책 만드는 사람이니 걱정이 앞서야 하는데 눈만 뜨면 청와대와 여의도로 시선이 쏠린다. “너무 힘들어서 돌아왔는데 여기가 더 힘드네. 허허, 참!” 대학을 정년하고 3년 기약으로 아프리카로 떠났던 P교수가 1년 만에 돌아와 털어 놓은 소회다. ‘마치 허방을 밟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가 죽고 나서/ 며칠 동안 가슴에 달고 있던/ 검은 리본을 떼어/ 나는 하수구 구멍에다 버렸죠/ 모두들 슬피 울었으나/ 나는 슬프지 않았죠/ 교복을 벗어던지고/나는 바다로 나아갔으니까요// 나는 검은 리본을 잊었죠/ 망각 위에 망령이 살아났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어느 날 바다에 갔다가/ 검은 리본을 만났죠/ 검고, 길고, 끈적끈적한 하수구가/ 바다에까지 혀를 대고 있었다니까요!”(안도현의 시 ‘검은 리본’)
‘그가 죽고 나서’ 나도 ‘검은 리본을 떼어’ ‘하수구’에 버렸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보다는 미지의 바다에 더 설렐 만한 나이였으니. 그런데 오늘 우리는 까까머리 시절 하수구에 서둘러 던져 버린 ‘검은 리본’을 다시 만났다. “검고, 길고, 끈적끈적한 하수구가/ 바다에까지 혀를 대고 있었다니까요!” “망각 위에 망령이 살아났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출판사의 작은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밤, 아니 새벽녘, 책꽂이의 그 많은 책 가운데서 왜 안도현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가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이 시집은 2008년에 나왔다. 기억하기로, 그가 낸 10여 권의 시집 중 현재까지는 이 시집이 마지막이다. 그는 2013년 여름, 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 맹세한다.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그 가치를 눈속임하는 일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 그 자체다.”
안 시인이 절필을 선언할 당시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 논란이 있었던 박근혜 정권 초기였고, 인용한 시가 실린 시집은 그보다 한참 전에 출간되었지만, 시인의 언중유골과 직관 앞에 새삼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실 그의 시집에는 ‘시의 성찬’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들이 빼곡한데 그날 새벽, 취기 어린 내 눈에는 자꾸 이런 구절들이 어른거렸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탁족도’). “물소리여, 사람이 죽어도 고요한 세상을 꿰차고 가는 물소리여”(‘곡비’).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조문’).
한 사람이 죽고 그이가 밟던 길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역설이 울림을 주는 것은 길이라는 것이 기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서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 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 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 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 주던” 할아버지의 길은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조문’)이 되었지만, 기억 속에서 그 길은 여전히 ‘동네의 길’이고, ‘슬프도록 야문 길’이다(이 대목에서 왜 물대포에 사망한 백남기 어른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길의 존재 증명을 끝내 이루어 내지 못했다. 까까머리 시절, 바다로 가는 길목을 점령해 버린 신군부의 함대와 그 함포에 난분분 떨어져 버린 1980년 오월의 꽃잎들과 지난한 대학 시절의 ‘가투’와 6·10항쟁과 ‘양김’의 분열과 전임 대통령의 투신과 용산이며 쌍용차 사태와 국정원 선거 개입과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혹은 거꾸로 유신독재와 이승만 독재, 친일 잔재 청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 ‘울다가 다 못 울고 죽은 것들’의 울음을 물소리가 대신하여 울어 줄 뿐이다(이 대목에서는 또 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이 떠올랐을까).
시인이 시집 제목을 ‘간절하게 참 철없이’라고 붙인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겠으나 우리는 너무도 성급하게, ‘참 철없이’ ‘검은 리본을 떼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망각 위에’ 되살아난 ‘검고, 길고, 끈적끈적한’ ‘망령’ 앞에서 지금 쩔쩔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이 ‘기억’이라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슬프고, 더럽고, 부끄럽고, 화가 나는 기억일지라도 ‘기억하기’를 ‘간절하게’ 실천해야 한다. 모든 길은,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므로.
‘그가 죽고 나서’ 나도 ‘검은 리본을 떼어’ ‘하수구’에 버렸다. 당신도 그랬을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보다는 미지의 바다에 더 설렐 만한 나이였으니. 그런데 오늘 우리는 까까머리 시절 하수구에 서둘러 던져 버린 ‘검은 리본’을 다시 만났다. “검고, 길고, 끈적끈적한 하수구가/ 바다에까지 혀를 대고 있었다니까요!” “망각 위에 망령이 살아났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그 가치를 눈속임하는 일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 그 자체다.”
안 시인이 절필을 선언할 당시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 논란이 있었던 박근혜 정권 초기였고, 인용한 시가 실린 시집은 그보다 한참 전에 출간되었지만, 시인의 언중유골과 직관 앞에 새삼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실 그의 시집에는 ‘시의 성찬’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들이 빼곡한데 그날 새벽, 취기 어린 내 눈에는 자꾸 이런 구절들이 어른거렸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탁족도’). “물소리여, 사람이 죽어도 고요한 세상을 꿰차고 가는 물소리여”(‘곡비’).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비탈길을 힘겹게 밟고 올라가던/ 느린 발소리와 끙, 하던 안간힘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그만// 길도 돌아가시고 말았다”(‘조문’).
한 사람이 죽고 그이가 밟던 길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역설이 울림을 주는 것은 길이라는 것이 기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서 어두운 동네 노인들 편지 읽어 주고 먼저 떠난 이들 묏자리도 더러 봐 주고 추석 가까워지면 동네 초입의 풀 환하게 베고 ‘물꼬 싸움’ 나면 양쪽 불러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심판 봐 주던” 할아버지의 길은 ‘풀들이 우북하게 수의를 해 입힌’ ‘지금은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조문’)이 되었지만, 기억 속에서 그 길은 여전히 ‘동네의 길’이고, ‘슬프도록 야문 길’이다(이 대목에서 왜 물대포에 사망한 백남기 어른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길의 존재 증명을 끝내 이루어 내지 못했다. 까까머리 시절, 바다로 가는 길목을 점령해 버린 신군부의 함대와 그 함포에 난분분 떨어져 버린 1980년 오월의 꽃잎들과 지난한 대학 시절의 ‘가투’와 6·10항쟁과 ‘양김’의 분열과 전임 대통령의 투신과 용산이며 쌍용차 사태와 국정원 선거 개입과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혹은 거꾸로 유신독재와 이승만 독재, 친일 잔재 청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길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다.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 ‘울다가 다 못 울고 죽은 것들’의 울음을 물소리가 대신하여 울어 줄 뿐이다(이 대목에서는 또 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이 떠올랐을까).
시인이 시집 제목을 ‘간절하게 참 철없이’라고 붙인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겠으나 우리는 너무도 성급하게, ‘참 철없이’ ‘검은 리본을 떼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망각 위에’ 되살아난 ‘검고, 길고, 끈적끈적한’ ‘망령’ 앞에서 지금 쩔쩔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이 ‘기억’이라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슬프고, 더럽고, 부끄럽고, 화가 나는 기억일지라도 ‘기억하기’를 ‘간절하게’ 실천해야 한다. 모든 길은,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