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시트콤 ‘논스톱’ 시리즈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제가 초·중학교 때 방영했던 시트콤이지요. 등장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삶에 대한 열정, 고민과 걱정을 나누며 싹트는 우정, 세상 심각하게 오고 가는 사랑, 어이쿠 실수를 하면 좋은 안줏거리인 듯 웃으며 장식하는 추억의 페이지. 저는 대학생들은 ‘논스톱’처럼 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도 방송안내 멘트가 기억납니다. “곧이어 청춘 시트콤 논스톱이 방송됩니다.” 맞습니다. ‘논스톱’은 그냥 시트콤이 아니고 무려 ‘청춘 시트콤’이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내용인즉슨 미국의 세계적인 금융투자회사 메릴린치에서 투자자들에게 보낸 보고서에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가상현실을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많은 과학자, 철학자, 비즈니스 리더들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미래의 후손들이 만든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을 확률이 최대 50%에 이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내용은 “연구진들이 가상현실에서 빠져나갈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2016년 10월 9일 오후 8시부터 저는 술을 마셨습니다. 서울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후배가 첫 시험을 본 뒤 광주로 내려왔죠. 덕분에 친구처럼 지내는 선·후배들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학시설 사건들의 ‘썰풀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재탕, 삼탕을 넘어 사골뼈가 우러나다 못해 녹아 버릴 정도로 수없이 이야기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잡다한 농담들이 섞이고 서로 입담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우리는 있었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2명,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며 대학원 석사 졸업 논문을 준비 중인 사람 1명, 다음 팟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는 사람 1명,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 1명, 그리고 그냥저냥 될 대로 되라 살고 있는 나. 과거의 이야기는 즐거웠는데 미래의 이야기는 참으로 무겁고 진지했습니다. 뜬금 없이 이런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왜 사냐고 물으면 그저 웃지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논스톱’ 시리즈의 결말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이랬던 사람들이 난관을 뚫고 어찌됐건 잘 살고 있다”입니다. 어렸을 적, ‘나도 커서 저렇게 되겠지?’라며 다음 시즌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은연중에 ‘저렇게 되겠지?’에 ‘잘 살고 있다’라는 결말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20대 중·후반을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벽을 쉼없이 두드려야 하는 처지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모두의 공통된 생각은 ‘그래도 우리가 배운 게 있는데 전공 살려 일해야지’였습니다만 현실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였습니다. ‘논스톱’에 나오던 인물들의 난관은 참 쉽게 뚫렸던 것 같은데 왜 우리의 난관은 두터운 정도를 넘어서 강철 콘크리트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졸업하고 느꼈던 첫 깨달음이며, 가장 큰 좌절은 “하고 싶었던 일은 그저 하고 싶었던 일일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깨달음은 “무조건 엑셀이다!” 거참. 4년 동안 글쓰기만 배웠는데….

만약 진짜로 이 세계가 가상현실이라면 탈출법은 어쩌면 죽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파헤칠 수 없는 것은 죽음 밖에 없으니까. TV뉴스에서 청춘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죽음이 ‘트루먼 쇼’의 탈출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깝게도 진짜 현실이 어마무시한 시궁창일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철학자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세상이 가짜라고 해도 우리는 진짜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설정된 난이도가 매우 높을 뿐.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고요.

문득 떠오른 글귀를 찾아보니 이백의 ‘산중문답’이라는 시였습니다. 시의 마지막 글귀는 ‘이곳이 인간세계가 아닌 별천지라네’입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제 방이 아주 아늑해 보이네요. 지금은 2016년 10월 10 오전 4시 33분입니다. 작금의 청춘에게 위로도 응원도 이제는 제 기능을 못하는 이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저의 친구들과 내가 모르는 어딘가의 친구들 모두 어찌됐건 잘 살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물론 저도요.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