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 있으면 아무도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해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파트 앞에 나와 서있는 ‘노란 머리’ 소녀. 그레이스의 엄마는 약물중독으로 늘 깊은 잠에 취해 있다. 학교에 데려다 줄 보호자가 없는 그레이스는 오늘도 집 앞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단 한 번도 얼굴조차 봤던 적 없는 한 남성이 그 소녀를 몰래 훔쳐본다. 바로 전직 브로드웨이 댄서였던 빌리다. 광장공포증과 공황장애가 있는 그는 그레이스와 다르게, 10년 넘게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에게는 큰 모험이자 결심을 한다. 늘 커튼으로 가려있던 창밖은 광장공포증이 있는 자신에겐 ‘엄청나게’ 위험한 곳이다. 바로 그 창밖 발코니로 나가보는 것. 얼마 전에도 총격사건이 벌어졌던 위험한 미국 LA 뒷골목을 매일 나와있는 ‘불안해 보이는 소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넌 왜 이 위험한 곳에 혼자 나와 있니?”

힘겹게 말을 꺼낸 빌리와 달리, 그레이스의 목소리는 유난히 컸다. 그리고 당돌했다. 둘의 대화 중 마지막에 그레이스가 말한다.

“저를 도와주실래요?”

미국 작가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소설 ‘흔들리고 있는 소녀를 보거든’의 이야기이다. 아동학대 처벌이 엄격하고 아동들의 복지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미국 정부는 그레이스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보호시설에 데려가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약물에 중독돼 자신을 방치하더라도 엄마와 헤어지는 게 싫은 소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울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LA 뒷골목 아파트에 사는, 하루 살기조차 팍팍한 이웃들은 마음과 달리 쉽사리 도움을 주기 힘든 상황이다.

이 소설 속 상황처럼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빽빽한 아파트 숲 속에서 이웃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나누는 것도 어색해져 버렸다.

소설에서는 ‘흔들리는 소녀’를 돕기 위해 이웃들이 나선다. 그렇게 서로 알게 되고, 서로 사연을 알게 되고, 결국엔 서로 의지하며 한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무릎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는 게 두렵고 슬픈 독거노인의 심부름을 해주고, 광장공포증으로 밖에선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빌리에게 용기를 줘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돕는다. 감정적이든 신체적이든 금전적이든 무엇인가 부족했던 이웃들이 냉대하던 예전과 달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대화’였다.

나는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다. 한 때 고시원 생활도 했다. 좁은 방에 나 자신을 가두고 행여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세라 항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늘 피로에 찌든, 삶에 찌든 듯 감정이 메말라 있던 탓일까.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고시생’의 삶은 고달팠고, 외로웠다. 그러다 문득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의연한 척, 태연한 척 바쁘게도 살아가는 나의 청춘을 발견하게 됐다.

‘아파트에서 독거노인이 숨을 거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흔하디 흔한 일이 됐다. 그저 길을 가다가 마주쳤을 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나눴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고시원에서 살 때 “몇 년 전 옆 고시원에서 수차례 낙방한 고시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최근에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아파트에서 투신한 한 남성의 기사를 봤다.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 아무리 태연한 척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연이 있고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다. 어쩌면 독서실 내 옆 책상에 앉아 있지만 늘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던 ‘저 친구’에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웃’은 있지만 ‘진짜 이웃’은 없다. 한마디 말을 건네는 것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도 있다. 서로 의지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소설 속 이웃들이 부럽다. 만약, ‘흔들리고 있는 청춘을 보거든’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