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6월은 서머타임이 실시되어 밤 9시가 되어도 어둠이 짙지 않았다. 계림동 서방 사거리에 있는 학교에서 종례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렀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나서기도 하고, 시위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일행이 함께 참여했더라도 최루탄 몇 방이면 흩어졌고, 지랄탄이 녹아내린 아스팔트 여기저기서 지랄을 하다가 식으면 시민들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광주고 앞을 지나 구역 사거리쯤에서 치약과 랩을 구했다. 식품을 포장하는 폴리에틸렌 얇은 비닐이 유행할 초기다. 얼굴에 치약을 바르고 랩으로 덮었다. 치약은 최루탄의 독한 냄새를 어느 정도 상쇄시켰고,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과 최루액은 랩으로 막았다. 이것이 시민들의 무장이었다.

금남로가 봉쇄되어 대체로 우리가 집결한 곳은 광주공원 부근이었다. 그날도 시민들은 금남로로 진출하기 위해 몇 차례 밀고 쫓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좀 쉬었다하자고 제안했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어느 중년이 도로에 우유를 쌓아놓고 마시면서 하라고 했다.

금남로 진출 주요도로는 광주대교와 백운동 서현교회 방면에서 시내로 연결하는 지금의 중앙대교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밤마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되었고 이 두 다리와 광주공원, 광주향교는 지형이 절묘하여 최루삼각지였다.

한숨을 돌리고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특별히 지휘하는 사람은 없었다. 치약을 덕지덕지 바르거나 수건을 동여매서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시민 구별 없이 한마음으로 섞여있었다. 누군가가 서현교회 쪽이 밀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공원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천변을 따라 올라갔다. 향교 부근까지 추격하던 경찰이 다시 다리 건너로 철수했다. 경찰이 물러나자 대첩이라도 한 듯 ‘사아랑도오 며어엉에도’는 소리소리 높아졌고, 어깨동무를 한두 팔은 더욱 결속되었다.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다보면 선두 대열이 매번 바뀐다. 어쩌다가 맨 선두에 서게 되어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면서 진퇴를 거듭하다가 우연히 옆사람을 봤는데 윤승현이었다. 치약 묻힌 승현과 나는 어깨동무를 한 채 서로 확인했다. 스크럼을 풀고 함께 대열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걸었다. 승현에게 ‘새끼보에 막걸리나 한 잔 하자’고 했을 뿐. 공원 앞 구동체육관 쪽으로 돼지가 온갖 부위로 절단되어 60촉 전구 아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루와 밤무더위 속에 누릇한 돼지머리는 시국이 한심한 듯 하늘로 향한 채 미동도 없었다. 막걸리 두 되가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에 나왔다. 서로 말이 없었지만 승현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서로에게 막걸리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연결고리였다. 옆 테이블의 중년들도 한바탕 하고 온 것 같았다.

각 한 되씩 막걸리를 마시고 새끼보 몇 점을 남긴 채 대폿집을 나왔다. 잘 가란 말도 없이 눈빛만 나누면서 헤어졌다. 당시 승현은 고등학교 산업체 특별학급 3학년 재학생이었고, 나는 30대 초반의 승현이 담임교사였다. 87년 6월 말까지 승현과 나는 수업이 끝나는 밤마다 광주천변 어딘가에서 함께했었다.

승현은 강진 도암중을 졸업하고 가정형편 때문에 광주의 산업체특별학급에 진학했다. 한 신문사 충장지국의 신문배달 소년이 되었고, 저녁 6시에 시작하여 밤 9시에 수업이 끝나는 근로학생이었다. 산특 3부생이라고 불렀다. 말이 없고 강단졌으며, 작은 체구이지만 내공이 있어보였다. 2학년 때 부당한 대우에 맞서다가 신문배달과 학업을 그만두기로 하고 무등산으로 잠적했다.

결석 일주일 쯤 승현이 학교 앞에 나타났다. 승현은 나를 보자마자 튀었다. 광주교대를 지나 두암동 쪽으로 뛰는 승현과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잡지는 못했지만 인연은 계속 되어 다시 가구공장에 취업하여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 후 ‘광주전남대학생문학연합’ 의장활동도 하고 ‘오월문학상’도 수상했다. 그 후 십 수년을 민중과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에서 주요활동을 하다가 얼마 전에 광주로 다시 내려왔다.

나는 ‘꼰대’가 되었고, 너는 오십 줄이 되어가는 장년이지만 활동은 여전하구나. 이번 6월에는 서울 특별시민의 안전을 위해 안전유리문을 고치다가 컵라면 먹을 시간 없이 불안전하게 가버린 젊은 영혼을 위해 잔을 올리고, 그 퇴주로 목마름을 달래보자. 광주공원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