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면 홍콩으로 이사하고 엄마 집도 사드릴 거야. 홍콩에서는 목숨 걸고 한다며 뭐든 할 수 있어. 중국 남자와 결혼하면 모든 게 허사지만.”

1996년 제작된 홍콩영화 ‘첨밀밀’(甛蜜蜜)에서 이교(장만옥)가 여소군(여명)에게 던진 대사다. 영화 첨밀밀은 1986년 3월1일부터 1995년 5월8일 대만의 국민가수 등려군이 사망하는 시점까지 ‘홍콩 드림’을 꿈꾸던 젊은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소군은 홍콩에 온 뒤 시골 고향엔 없는 ‘맥도날드’를 찾아간다. 광둥어(廣東語)는 물론, 영어도 할 줄 몰랐던 그는 주문부터 헤매고, 보다 못한 ‘알바’ 이교가 그를 도와준다. 이후 이교가 여소군에게 영어학원을 소개해주면서 가슴 저린 9년간 사랑이 시작된다. 사실, 내 또래 중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소군이 이교를 자건거에 태우고 ‘캔턴 로드’ 일대를 달리며 불렀던 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첨밀밀은 ‘꿀처럼 달콤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노래는 달콤하다. 그러나 영화 속 두 청춘의 삶과 사랑은 텁텁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당시 홍콩의 사회상이 그대로 녹아 있어서일까?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 한 톨을 씹은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떫기만 했다.

고향을 떠나 동병상련 서로를 의지하며 악착같이 일하던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교는 늘 여소군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우린 좋은 친구지? 나와 고생도 함께하고 나를 즐겁게도 해주고, 사실 넌 홍콩에서 제일 친한 친구야.”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관계를 ‘친구’라는 말로 외면하기 위해 끊임없이 묻는 이교. 홍콩에서 ‘성공’하기 위해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청춘.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에 죄책감을 느끼던 여소군에게 그녀는 결국 이별은 통보한다.

“여소군 동지, 내가 홍콩에 온 목적은 네가 아니야. 네가 홍콩에 온 목적도 나 때문이 아니야.”

과연, 그들만의 얘기일까? 청춘들이 마주한 지금의 현실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저 멀리 호주나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대학생들.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들. 영화는 오래전 끝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실에 남아 있다.

집 근처를 걷다가 무심코 “홍콩같다”라는 말을 뱉었던 적이 있다. 지난해 다녀온 홍콩의 ‘별빛이 속삭이는’ 밤거리를 닮아서가 아니다. 초고층 ‘빌딩 숲’이 늘어선 홍콩은 퇴근시간이면 삶에 찌든 수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감춰진 홍콩의 이면이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도 다를 바 없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빽빽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억척같이 살고 있는, 햇볕도 들지 않는 좁디좁은 고시원에서 외로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들 얼굴이 그려졌다.

포기할 게 너무도 많은 청춘의 삶은 1986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우리에겐 ‘N포세대’라는 꼬리표도 붙었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넘어 희망과 모든 삶의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라는 뜻이다. “교사를 만나라”, “공무원을 잡아라”, “집은, 차는 있어?”라며 남의 일에 끼어드는 어른들도 참 많다. 결혼을 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구해야하고, 그렇지 못하면 감히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돼 버렸다. 조금 더 안정된 삶을 찾아 연인을 떠나는 것도, 떠나는 연인을 보내줘야 하는 ‘스토리’는 아직도 익숙하다. 포기가 익숙한 청춘들에겐 깊은 체념과 만성적인 분노만이 남았다.

영화 말미 여소군과 이교는 뉴욕의 한 길거리에서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전자제품 상가의 TV를 보다가 우연히 만난다. 영화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결국 잘나가는 사채업자를 만나 고향에 집을 지은 이교, 약혼녀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여소군. 이 둘은 자신들이 말하던 꿈을 이뤘음에도 전혀 행복하지 못했다.

나와 내 친구들, 이 시대 청춘들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사랑조차 포기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아둥바둥 살고 있는 걸까? 나를 ‘취하게’ 만든 영화, ‘첨밀밀’의 취기가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