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노라…”〈변영로 작 ‘봄비’ 중에서〉

올 봄에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린다. 올해, 봄비는 연둣빛 잎새를 톡톡 두드리며 방문하는 ‘은실’ 같기도 하였다가 장맛비 같기도 하고 소란스럽게 휘몰아치는 장대비와도 같아서 다채로운 빗소리의 즐거움을 누리게 했다. 봄비가 미세먼지를 씻어주고 산불예방도 하는 등 경제적 가치도 어마어마하다하니 이 더욱 반갑다.

김경주 작가(1956∼ )의 ‘녹우’(2001년 작)는 실비 내리는 물가 버드나무 아래 빨간 우산을 받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봄비의 서정을 가장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라 꼽고 싶다.

화폭이 무너져 내릴 듯 눈 시린 초록으로 물이 오른 왕버들은 푸른 강에 가닿을 듯 가지마다 잎새를 늘어뜨리면서 보는 이의 손을 잡고 이끄는 듯하다. 풍경화 속 점경 인물로 묘사된 여인은 비 내리는 물가에 쓸쓸하게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녹음과 보색을 이루고 있는 빨간 우산이야말로 화룡점정인 듯 그림 곁을 떠나도 여인의 영상이 오래 남는다.

그림도 글도 경험으로 본다고 영락없이 추억 속 전남대 용지일거라고 확신했던 것과 달리 그림 속 공간은 작가가 오래전 찾았던 화순 능주 영벽정의 풍경을 현장에서 스케치했다가 작업실에 돌아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화창한 봄날은 봄비 속에 사위어가고 빗물은 녹음과 뒤섞여 푸르른 빗줄기처럼 ‘녹우’되어 내렸을 것이다.

작가는 대학시절 유화를 전공하였고 이후 목판화가로, 민중미술계열 수묵화가로 ‘오월의 판화전’을 비롯해 목판화 개인전, 수묵화 개인전을 갖는 등 8·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에 시대적 울림을 주는 작품을 다수 발표해 왔다. 현재 동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교육에 매진하고 있어서인지 작품 발표가 뜸해 아쉽다. 작가의 작품 활동 재개 소식이 기다려진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