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스쿨인 여고에 다니면서 어느 해 성탄절을 앞두고 친한 친구 전도로 교회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성가대 지휘를 하는 교회 오빠를 좋아했었다. 당시 여학생들에게 ‘교회 오빠’는 로망이었다.

성탄절 즈음의 축제와 같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또 마음에 둘 ‘교회 오빠’가 없어서였을까. 나의 신앙은 더 이상 자라지 못했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거나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번갈아 뒤적이면서 폼만 잡다 여고시절을 보냈다.

성탄절 무렵이면 이런 추억들과 함께 루벤스 같은 화가가 되고 싶은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 ‘플란더즈의 개’도 함께 생각난다. 루벤스의 그림이 걸린 동네 성당에 돈이 없어 들어갈 수 없었던 네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그림 앞에서 굶주린 채 얼어 죽으면서도 행복해한다.

네로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한 그림이 바로 피터 파울 루벤스(1577∼1640)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1611∼14년 작)이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대성당 제단 위를 장식한 이 그림은 중앙 패널에 위치한다. 십자가에서 천천히 내려지는 예수의 육신을 둘러싸고 대각선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이 그림은 빛이 예수의 몸과 그 아래 새하얀 수의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거룩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극적이지만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당시 신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화가들의 화가’로 불리는 루벤스는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외교관이자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림 주문이 쇄도했지만 큰 조직력을 지닌 루벤스가 제자, 조수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한 것도 유명하다. 루벤스의 구상에 따라 조수들이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마친 후 루벤스가 본격적으로 붓을 들고 얼굴이나 비단 옷에 손질을 더하여 조화롭게 완성하곤 했다. 루벤스는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생기를 띠게 된다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랬기에 네로의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