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구나!/…/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너에게 살의를 느낀다/가을이여, 원수 같은.” 〈정현종 작 ‘가을, 원수 같은’ 중에서〉

가을날이 얼마나 사무치게 좋았으면 고문, 살의, 원수와 같은 역설의 단어를 추려냈을까? 감정을 간수하지 않아도 되는 시인의 표현을 무한 부러움으로 되뇌어본다.

가을이다. 이 계절은 색깔로 주변을 압도한다. 푸르른 하늘, 황금빛 들녘의 눈부신 색채를 그 누가 재현할 수 있을까? 가을 들판을 바라볼 땐 어김없이 지난날 축제와도 같았던 가을 들녘의 정경을 담은 한 점의 그림이 떠오른다. 한국화가 석현 박은용(1944∼2008)의 작품 ‘추수’(1998년 작)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정겨운 가을 들녘을 보여준다. 봄날 씨 뿌리고, 모내기 하고, 추수 후 한가한 날 주막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농부의 모습처럼 우리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농촌의 서정 중 가장 절정의 한 순간이다.

진도 출신의 석현은 생전에 주위로부터 고흐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작가다.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순수한 감성의 덩어리로 희망을 그렸고, 흡사 광기와도 같은 예술의 열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십 수 년 전 화가를 만났을 때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던 그의 예술세계와 인생역정에 귀 기울이던 기억이 아련하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무등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20시간씩 작업한 결과 펼쳤던 발표전은 큰 화제가 됐다. 점을 찍는 방법으로 공들여 그린 그의 ‘점묵법’ 작품들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연한 먹에서 진한 먹까지의 10단계에 이르기까지 한 단계씩 건조한 다음 붓 자국을 탑처럼 쌓아올렸다 해서 ‘탑묵법’이라고도 했던 독특한 기법이 특징인 그의 작품은 한번 보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쓱쓱 붓끝으로가 아니라 한 점 한 점 탑을 쌓아올린 그의 화폭은 땀으로 일군 가을 들판만큼이나 가슴 가득 차오른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