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세 가마, 라면 세 박스.

지난 주말 팔순의 시어머니께서 비축해놓으라며 당부하신 목록이다. “전쟁 겪어봐서 안다. 전쟁 일어나면 식량이 있어야 안 굶어 죽어야….”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초긴장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설마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겠어.’ 했던 안이한 마음이 슬며시 불안해졌다. 우선 라면 한 박스를 ‘사재기’해 두었다.

다행히 남북 군사적 대결 상황이 극적으로 타결되었고, 그때까지 대다수 사람들처럼 평온한 일상을 보냈지만 “만일, 설마”하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분쟁의 고통과 참혹함이 너무나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출신의 프란시스 고야(1746∼1828)는 전쟁 그 자체가 폭력이고 공포임을 일찍이 인류에게 고했던 작가다. 1808년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러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의 군인들이 저지른 잔악행위를 묘사한 ‘전쟁의 참화’ 동판화 연작과 ‘5월3일 밤의 처형’등을 통해서도 전쟁의 광기와 불행을 직접적으로 담아냈고 고발했고 증언했다.

작품 ‘거인’(1810∼1812년 작) 역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거인’은 고야의 대표작으로 꼽혔으나 몇 년전 캔버스 뒤편 서명 AJ가 발견되면서 고야의 제자인 아센시오 훌리아(Assensio Julia)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고야가 직접 그리지는 않았지만 고야의 화풍이 확연하게 보인다.

이 작품에서 폭풍 직전 검은 구름 위로 등장한 거인은 수평선 부근에 다리를 벌리고 서있고 거인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과 역마차, 짐승들이 공포에 싸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처음 대했던 순간, 불안과 공포가 으스스하게 전달됐던 기억이 난다.

전쟁은 누구에게라도, 어느 때에라도 ‘거인’의 화면 가득 떠도는 음울하고 참혹한 고통처럼 처참한 모습일 것이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인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