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 하였습니다/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이성복 작 ‘그 여름의 끝’중에서〉

한 여름 백일홍 붉은 꽃이 한창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연달아 찾아온 태풍 ‘찬홈’과 ‘낭카’의 위력 앞에서도 끄덕하지 않고 피어난 모습이 참 화사하다. 요즘 백일홍은 가까운 사찰이나 공원, 길가에 나란히 심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고관대작의 정원에 주로 심었다고 한다. 그 까닭에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사랑받는 꽃이었고, 옛글에도 자주 등장하게 된다.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1758∼ ? )의 작품 ‘소년 전홍(少年 剪紅)’(1758년 작)은 장죽 문 청년이 여인의 손목을 은근히 끌어 잡고 있어 남녀의 연정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꼽힌다. 배경으로 지나치기 마련인 큰 괴석과 세 그루의 백일홍이 우연히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혜원의 풍속 화가다운 면모는 빼어난 인물묘사에 있고, 풍속화는 상황 설정만으로도 그림 읽는 재미가 컸던 탓에 그 동안에는 그림 속 풍경을 무심히 지나쳤던 것 같다.

오른쪽 상단의 화제 “빼꼭한 잎엔 농염하게 푸른 빛 쌓였는데/수북한 가지엔 잘게 붉은 꽃을 잘라 붙였네(密葉濃堆綠/繁枝碎剪紅)”도 백일홍을 묘사한 글이다. 미술사학자 최완수선생(간송미술관 관장)이 그림의 제목을 ‘소년이 붉은 꽃을 꺾다’라는 뜻으로 ‘소년 전홍’이라 한 것도 화제를 풀어서 붙인 것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이 그림에서 백일홍이야말로 배경이 아니라 상징적인 소재였던 것이다.

혜원은 김홍도의 화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기 보다는 세상사 즐거움과 남녀 간의 로맨스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세태 풍자나 인간 본연의 심성을 감추지 않은 노골적인 여속도를 즐겨 다뤘던 혜원은 그 이유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진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