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길었던 명절 연휴는 여러모로 유용한 시간이었다. 명절을 쇠고 짧은 여행과 한 편의 영화, 그러고도 남은 시간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뒹굴거리며 그토록 원했던 게으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행지였던 제주도에서 만난 것은 바람이었다. 따뜻한 남쪽답게 2월의 훈풍은 나른함을 더해주고, 풍문으로 듣고 들렀던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의 ‘바람 뮤지엄’은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해주었다. 도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어떻게 전시할 수 있을까? ‘바람 뮤지엄’에는 목조 건물의 가느다란 세로 틈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바람을 만나 특별한 그림을 그리면서 소리와 흔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바람을 만나고 나니 제주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바람의 화가’ 변시지 화백(1926∼2013)의 작품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서귀포 출신의 변시지 화백의 작품 ‘폭풍의 바다 2’(1993년 작)는 화백이 줄기차게 보여주고자 했던 제주의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폭풍이 치는 바다, 초가집, 까마귀, 기울어진 소나무, 조랑말, 어깨를 움츠린 사내 등을 그리면서 제주의 혼과 숨결을 황토색으로 승화시켰던 화백은 제주의 거친 바람 속에서 오히려 평온을 찾곤 했다고 한다.

작가론 ‘변시지-폭풍의 화가’의 저자 서종택교수(고려대)는 “작가는 제주의 선과 빛과 형태에서 그의 삶의 근원적인 고독이나 설화의 줄거리를 찾으려 했으며…, 그의 화폭에 이는 풍랑과 바람에서 우리는 삶의 외경과 현 존재의 시련을 함께 볼 수 있었다”고 들려준다.

하룻밤을 사이에 두고 가늘었던 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며 바람결이 거세졌다. 밤새 창 밖에는 키 큰 야자수가 휘청거리고 검푸른 바다는 격랑을 일으켰다. 화폭을 뒤덮듯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온몸을 흔들던 제주의 바람이 실감났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