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방 꼭 텅 빈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텅 빈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하늘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나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어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서정주 작 ‘기도 1’〉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가을 풍경의 절정이다. 들판은 계절에 따라 다양한 ‘생명의 빛깔’로 시시각각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지만 황금빛 나락, 추수 마친 텅 빈 대지의 빛깔은 그 모습 그대로 감동이다. 빈 들판에서 도리어 ‘텅 빈 충만’이 차오른다.

농민화가 장 프랑스와 밀레(1814∼1875)의 그 유명한 작품 ‘이삭줍기’(1857년 작)에는 그런 감동이 있다. 구도나 색채가 지극히 고전주의적인 이 작품은 세 여인이 저물 무렵 엄숙한 분위기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농촌 풍경이다. 처음 이 작품이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화단에서는 두 갈래 비평으로 논란이 됐었다. 이삭줍기는 농민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민들의 일인데, 그림에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들의 자태가 우아하게 묘사되어 현실감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전원생활의 가혹함을 보여주는 혁명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가 번영과 풍요의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대대적인 주장을 하던 때였지만 밀레는 도시와 시골의 빈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주가 수확한 곡식을 마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이삭을 줍는 것조차 시의 허가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성경에서도 ‘추수할 때 밭모퉁이에 있는 곡식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했다. 이삭은 가장 가난한 이들의 최후의 식량이었던 것이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농민에 대한 밀레의 깊은 애정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