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마른 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안도현 작 ‘가을의 소원’중에서〉

시인의 소원에 ‘하루 종일 뒹굴며 책 읽는 것’을 추가하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이면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고전도 펼쳐보고, 다시 읽어볼 양으로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놓았던 구절도 되새김질 해보고 싶어지는가 보다.

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은 ‘독서력’이 탄탄한 사람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독서가의 도서목록은 당장 읽을 계획이 없더라도 일단 소장해두면 마음 든든하다.

유난히 책과 학문을 숭상한 겨레이어서인지 조선시대에는 책을 진열한 책 장식장 그림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장식장 그림인 다보격(多寶格)은 장식장을 도자기, 청동기, 옥 등 보배스러운 다보로 꾸몄다면, 조선에서는 책가도 또는 책거리라 하여 책을 비롯하여 도자기, 문방구 등으로 장식한 그림이 그려졌다.

조선시대 최고의 책거리 화가로 꼽혔던 이형록의 ‘책거리 병풍’(19세기 작)은 짜임새 있는 구도, 중후한 색채,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가에는 책과 도자기 등 진귀하고 아취 있는 문방애완물이 가득하고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원근법의 공간에 음영법까지 표현되어 있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의 저자 정병모교수(경주대 문화재학과)는 “정조대왕이 일찍이 대신들에게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샘솟는다’고 강조하면서 ‘책거리그림’을 구상했다”는 기록을 전한다. 책거리는 당시 조정의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조선시대 후기에 무너져 내린 신분 질서와 경제성장에 힘입어 일부 부민층의 호사취미의 대상이 되다가 서민 취향의 민화 책거리로 퍼져나갔다고 하니 계층을 넘어 사랑받은 그림이었던 셈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