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토한 뒤 눈물 닦고 코풀고 나서/우러른 잿빛 하늘/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이봐/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이것 봐/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그게 무화과 아닌가…”〈김지하 작 ‘무화과’중에서〉

나의 젊은 날이 화사한 ‘꽃 시절’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정녕 꽃 시절은 오지 않았지만, 한참 후에야 시인의 시를 접하고 ‘꽃 없이 열매 맺는 것’의 늠름한 의미를 알게 되어 편안해졌다. 무화과를 좋아해서 생과일은 물론, 잼이나 약밥에 버무려진 말린 무화과까지 반색하는 내게는 무화과 수확이 한창인 이즈음이 행복한 계절이다.

서양 미술에서는 정물화에서 무화과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많이 그려졌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서 해골, 책, 악기, 사과, 굴 등과 함께 무화과도 단골 소재였다. 라틴어로 ‘허무, 덧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는 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업적이나 쾌락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여러 정물로 그 의미를 표현했다.

17세기 바로크의 대가 카라바조(1571∼1610)의 작품 ‘과일 바구니’에도 한 쌍의 무화과가 등장한다. 벌레 먹은 사과와 잎이 시든 포도송이, 무르기 시작한 무화과 등 과일이 한 바구니 가득 담겨있다.

이 시기 과일들은 석류의 경우 부활을, 사과와 무화과는 원죄, 포도는 성찬식의 기적을 상징했다. 카라바조의 정물화 역시 바니타스 정물화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예술적 깊이는 남다르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카라바조의 예술성이 스며든 듯 보인다.

카라바조는 싸움, 성공, 동료들의 시기, 결투, 살인, 소송, 도주, 사형선고, 해변에서 맞이한 죽음 직전의 사면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삶과 예술에 치열했던 그였기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당대 예술의 공허한 환상을 깨고 새로운 예술정신을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