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몇 차례 태풍과 폭우, 신적 영감을 한껏 느끼게 해주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골진 갈등들. 그래서인지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짱짱하게 푸르른 빛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한결 순해진 햇살을 느낄 겨를은 꿈도 꾸지 못하다가 어제는 장엄한 저녁노을에 이끌린 몇 분간의 산책으로 설레었다. 발아래 풀숲들의 거친 모습이나 무성함도 새삼 가슴을 훅 친다.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작품 ‘풀밭’(1503년 작)이 꼭 그런 느낌을 준다. 전통적인 독일 양식인 후기 고딕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받아들였던 뒤러는 종교개혁의 새로운 물결에 맞서 이에 걸맞은 인간유형을 작품으로 형상화해 ‘묘사의 미술’이라 일컫는 독일미술의 새 장을 열었던 작가. 평생토록 미의 궁극적인 모습을 찾으려고 애써왔던 뒤러가 묘사한 잔디 한 덩어리는 어찌 보면 사소하기까지 하다. 자연의 일부 이미지에서 특별한 감동을 받았을 동기가 있었을까?

뒤러의 예술 평전을 펴냈던 20세기 미술사의 거장 하인리히 뵐플린(1864∼1945)은 “뒤러의 모든 묘사는 아주 뚜렷한 질서와 비례로 녹아들어 있다. 풀잎들은 아무렇게나 배열된 것이 아니라 형태에 질서를 잡아주는 일정한 조화와 법칙이 있다”고 언급한다. 작품 ‘풀밭’의 비밀은 자로 잰 듯한 배열의 법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더욱 친밀하고 정다운 느낌을 준다는 데 있다.

뒤러는 신이 의도한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의 원형을 자연법칙에서 발견하고자 했기에 모든 창조 대상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시각기관을 되도록 완벽히 사용하겠다는 야심을 지니기도 했다. 풀잎 한 줄기를 정확하게 보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한 화가의 작품을 앞에 두니,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