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이육사 작 ‘청포도’ 중에서〉

한 잔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나’를 어린 시절로 빨려 들어가게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빼어난 설정이다. 며칠 전 한 카페에서 청포도 주스를 마시면서 프루스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포도에 관한 상념에 젖어본다.

한때, 전원생활의 부푼 꿈으로 청포도와 거봉 등 포도밭 농사를 도운 적이 있었다. 봄이면 포도순 솎는 일이 한 짐, 주말마다 고된 노동이 따로 없었고 태풍에는 참으로 마음 졸였었다. 요맘때 쯤 ‘땀의 결정체’인 포도 한 알을 따먹었을 때의 그 달콤함은 지금도 ‘귀하디 귀한’ 황홀함으로 남아있다.

포도를 그렸던 가장 유명한 화가는 조선 중기 선비화가 황집중(1522∼ ?)이다. 포도는 서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유입된 후 자손 번성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고려청자나 조선 초기 백자에 그려지다가, 조선 중기에는 먹으로 그리는 포도그림의 소재로 사랑받았다. 탱글탱글한 포도 알, 넓적한 이파리, 꼬불꼬불한 넝쿨 등이 수묵화가가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황집중의 작품 ‘묵포도도’는 위에서 아래로 빗겨져 내린 가지의 대각선 포치, 동그란 포도 알의 입체감이 탐스럽고 벌레 먹은 잎과 넝쿨 말림새의 묵법과 농담의 변화가 돋보인다.

황집중의 묵포도는 흔히 조선 초기의 신사임당과 비교된다. 신사임당은 산수화, 초충도, 채색 화조화를 비롯 묵포도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여 몇 점의 묵포도도를 남겼지만, 황집중은 포도 한 가지만으로 일가를 이뤄 이정의 대나무, 어몽룡의 매화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진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