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정씨 강씨 권씨 최씨…. 이 나라의 모든 성씨를 합쳐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백성(百姓)이다.”

하필, 마지막 회였다. 대하 사극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에 빠져든 것은. 드라마 방영 초기부터 화제를 모았건만 뒤늦게 정도전에 매료됐다. 드라마 다시보기에 이어 밤마다 여말선초의 역사서적을 읽느라 요즘 토끼 눈이 되어가고 있다.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안녕한 나라를 꿈꾸었던 ‘혁명적 지식인’ 정도전의 위대성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 새로운 경제 체제를 펼칠 수 있는 민본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는 점인 것 같다. ‘정도전과 그의 시대’의 저자인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은 “소수의 권세가가 나라의 부를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던 고려 말의 상황은 소수의 갑과 다수의 을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현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정도전 같은 인물이 자꾸 회자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지식인이 필요한 시대라는 반증”임을 강조한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이방원의 습격으로 희생당했던 삼봉은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었기에 영정이 남아있을 리 없다. 다행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인물의 초상을 전통기법으로 그려오고 있는 한국화가 권오창화백(1948∼ )이 지난 94년 삼봉의 영정을 제작해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삼봉의 사당인 경기도 평택 문헌사(文憲祠)가 소장하고 있다. “온화한 빛, 엄중한 용모, 높은 덕과 하해 같은 관대함, 믿음성, 결단성, 큰 국량”등으로 묘사되어 있는 삼봉에 관한 기록과 후손들의 얼굴을 살펴 완성된 영정에서는 과연 ‘조선의 설계자’로서의 기상이 느껴진다. 작품 ‘정도전 초상’은 문헌사에 소장된 좌상을 범본으로 한 입상화로 복식과 장식 등이 충실하게 고증된 것도 돋보인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