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4월 중순, 광주 나인갤러리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불쑥 나타났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미국 대사였다. 한국에 부임한 후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한 그는 공식일정을 하루 앞두고 통역요원만 대동한 채 예술의 거리를 찾았다. 마침 개인전을 열고 있었던 서양화가 조근호는 TV에서만 봤던 ‘VIP’의 깜짝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버시바우 대사의 진지한 자세였다. 조 작가의 작품을 유심히 둘러본 그는 소재에서부터 기법 등 이것 저것 세심하게 물어봤다. 사실 버시바우 전 대사의 예술사랑은 외교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평소 퇴임 후 미술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게 꿈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로 그는 틈만 나면 전시장을 둘러봤다. 이날 30여 분 동안 갤러리에 머물던 그는 또 다른 ‘볼거리’를 찾아 예술의 거리로 나섰다.

최근 기자는 문화생활을 즐기는 또 한 명의 멋진 ‘리더’(leader)를 만났다. 지난 14일 주한 독일문화원 광주어학센터 개원기념으로 전남대 예술대 강당에서 열린 독일 팝 뮤지션 막시밀리언 헤커 축하공연에서였다. 주인공은 롤프 마파엘 주한독일대사. 지병문 전남대 총장과 함께 행사장을 찾은 그는 1시간 30분의 공연과 뒤풀이에도 참석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물론 주한 독일대사관의 행사인 만큼 ‘수장’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아티스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등 ‘적극적으로’ 공연을 즐겼다. 지 총장이 공연 시작 후 10분 만에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나간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문화를 즐기는, 멋진 리더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높으신 분’들을 보기가 어렵다. 전시회나 페스티벌, 공연장을 ‘찾는’ 리더들은 많지만 오프닝 행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난다. 다른 일정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개회사나 축사를 마치면 행사장을 빠져나가는 게 ‘문화’가 돼버렸다.

지난 18일 열린 동아시아 문화도시 2014 광주 개막 공연이 그런 경우다. 이날 인사말을 통해 “오늘 만큼은 ‘끝까지 남아’ 문화의 향기에 푹 빠져 보라”던 강운태 광주시장이 중간에 자리를 뜨자 상당수의 기관장이 공연장을 떠났다. 객석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은 물론이다.

예향 광주를 이끄는 리더들은 누구보다도 문화마인드를 갖춰야 한다. 전시회나 공연의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한 말씀’을 한다고 저절로 ‘문화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지르르한 축사 보다는 ‘뒤풀이 대화’로 문화현장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자. 더도 말고 한 달에 한번만이라도.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