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면/허물없이 찾아가/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말할 수 있는/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도/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있었으면 좋겠다…”〈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중에서〉

연말 송년모임이 잦은 때다. 인간관계가 넘쳐날수록 역설적으로 외로워진다. 인터넷, 트위터, SNS 등 디지털 인맥 과잉시대에 오히려 얼굴 마주보고 대화하는 오붓한 시간을 갈망한다.

현대인들은 흔히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바로 그 길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를 놓쳐 버린다”고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도 여럿이서 왁자하게 만나는 모임에서 더 고독한 적이 있었고, 그 느낌이 싫어 더 명랑하게 수다쟁이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한해가 저무는 때에는 정말 좋아하는 친구와 정겹게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그 친구가 자신이어도 좋으리라. 내면과 대화를 나누며 번잡했던 한 해를 고요하게 뒤돌아보는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판화작가 이철수(1954∼ )의 작품 ‘차 한 잔’(1995년 작)은 홀로 차를 마시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80년대 민중 판화 작가로 이름을 높이던 작가는 자연과 인생을 사유하면서 그러한 모든 대상을 그리고 새기고 찍어오고 있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판화작업에 쏟아낸 작가답게 화면에 나타난 간결한 선묘의 형상화, 짧은 시어의 글귀가 때로 죽비가 되어 깨우침을 준다. 판화가이자 시인이고 농부이자 문리를 깨친 도인의 그림 한 점이 연말이라 부산했던 이 마음을 정갈하게 다듬어준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