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나의 얼굴/두툼한 나의 입술//알알이 붉은 뜻을/내가 어이 이르리까//보소라 임아 보소라/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 작 ‘석류’중에서〉

지구 온난화 탓인지 시월 중순이 되어서야 여름의 끝을 지나 가을을 맞이한다. 얇아진 햇살, 청량한 바람, 노랗게 물들어가는 중외공원의 나뭇잎들….무엇보다 아파트 입구에 할머니들이 시골집에서 막 따왔을 성 싶은 석류, 모과, 홍시들을 펴놓은 좌판에서 가을을 만난다. 한 알의 석류를 보니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그림이 떠오른다.

영광에서 태어나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우리 언어와 우리 정서로 우리 시조를 써온 조운(1900∼?)의 ‘석류’는 과문한 내겐 가장 열렬한 사랑 고백의 시로 여겨진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가슴을 빠개 젖혀 뜨거운 심장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강연균 화백(1941∼ )의 수채화 ‘석류’(1991년작)는 조운의 시조에 등장한 석류가 알알이 영롱하게 묘사되어 있다. 30호 크기의 화폭에 석류 한 알을 화면 가득 확대하니 조그마한 석류알이 지구처럼 우주처럼 거대하게 다가와 시선을 압도한다. 강화백은 “조운 시인의 시조를 접한후 가졌던 감동, 석류가 가지고 있는 회화적 조형적 응축미, 전위적인 느낌을 폭발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고 20여년 전 작업시절을 회상했다. 색채의 새로운 미의식과 실험적인 조형성으로 늘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강화백의 수채화는 특히 그 이전의 정물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과, 대광주리, 호박 등 정물의 대상을 토속적이고도 향토적인 범위로 확장해 언제나 선구자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하루도 그림 그리지 않은 날이 없는’ 강 화백을 만나러 소태동 화실을 찾은 날, 얼마전 말바우시장에서 구해 온 석류 한 소쿠리가 화면에 반쯤 옮겨져 있었다. 석류 한 알이 ‘빠개 젖혀진 가슴’ 사이로 보석같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