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눈부신 순간에/스스로 목을 꺾는/동백꽃을 보라/...모든 언어를 버리고/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허공에 한 획을 긋는/단호한 참수/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문정희 ‘동백꽃’ 중에서〉

천지가 만화방창 꽃들로 가득하던 날도 잠시, 어느새 꽃 진 자리마다 연둣빛 이파리들이 꽃만큼 찬란하다. 봄은 꽃망울로 터지지만 만개, 낙화로 무르익는다. 낙화의 절정으로 꽃봉오리째 지는 동백꽃 만 한 게 어디 있을까. 주말 봄바람에 떠밀려 유명한 동백숲엘 갔다가 낙화로 붉게 물든 풍경 속으로 ‘차마’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시구처럼 처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대신 그 풍경 위로 그림 한 점이 겹쳐왔다.

‘역사적 풍경화’로 이름난 서양화가 강요배(1952∼)의 작품 ‘동백꽃 지다’. 슬픈 서사로 더 붉은 한라산 동백을 그린 그림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독립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가 제주 4·3의 역사를 다룬 것처럼 화가는 오래전 그림을 통해 한국 현대사 속에서 망각됐던 제주 4·3을 되살려 냈다. 희생된 넋을 상징하는 붉은 한라산 동백이 클로즈 업 된 화면의 한 귀퉁이에 사라져가는 유격대원의 비극적인 뒷모습도 보인다. 화가는, 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진자리에서 새 꽃으로 피어나는 동백꽃의 낙화를 통해 새롭게 전개될 역사적 전망을 암시하고자 했다.

제주 출신의 화가 강요배는 서울대 미대를 나와 잠시 서울생활을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22년째 제주에서 작업해오면서 차분하고 은유적인 어법으로 묘사한 제주의 감동적인 풍경과 신화를 보여주고 있다.

풍경 뿐 아니라 화가가 그린 호박꽃, 감나무, 한 바구니의 감자에도 땅에 스민 제주의 서사가 더해져서인지 기억의 현재성이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