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의 ‘일리아드’는 트로이의 옛 이름인 ‘일리온’의 이야기, 즉 트로이 전쟁을 다룬 대서사시다. 황금사과 한 알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오딧세우스의 ‘트로이 목마’ 작전으로 트로이가 불바다가 되면서 막을 내린다. 트로이 전쟁의 명분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데리고 달아난 데 있지만, 진짜 이유는 그리스인이 무력으로 트로이의 부를 빼앗으려고 일으킨 전쟁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외부 요인으로 내부가 무너지는 치명적인 위험을 상징하는 ‘트로이 목마’는 그 악명 그대로 오늘날에도 ‘잠재된 위험’ ‘숨어있는 재앙’임이 확실한 것 같다. 지난 주 방송 금융기관의 전산망을 마비시킨 악성 코드가 ‘트로이 목마’로 밝혀진 것을 보면 말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차지하게 될 황금 사과의 주인을 가리는 대목이다. 일명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이 매력적인 신화의 주제는 루벤스, 와토, 르느와르 등 여러 대가들이 수없이 그렸다. 그 중 루벤스(1577∼1640)의 ‘파리스의 심판’은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와 빛의 묘사가 압권이다. 가장 왼편은 메두사 방패와 올빼미를 곁에 둔 아테나, 아프로디테 뒤에는 에로스, 오른 쪽 헤라여신의 발밑엔 공작새가 보인다. 아프로디테만큼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파리스의 눈길은 이미 넋을 잃고 가운데로 향해 있다.

이 명작에서 신화의 매력과 함께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크 미술의 회화적 격정이다. 고전적인 미의 이상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색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 쉼없이 꿈틀대는 운동감! ‘파리스의 심판’을 보면 바로크적 감각으로 대상을 탁월하게 묘사했던 루벤스의 재능에 사로잡히게 된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