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뒤따르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 ‘야설(夜雪)’을 즐겨 암송하였다. 우리의 소망인 민족통일을 위해 역사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던 민족지도자다운 좌우명이다. 백범이 남긴 발자취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오랜 시간 민족지도자의 삶이 남긴 의미를 망각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의 어느 독립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힘찬 민족적 항거였던 1919년 3·1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절을 앞두고 문득 숙연해진다.

김호석(1957∼)의 인물초상화 ‘항거-백범 김구’(1988년 作)는 참으로 옷깃 여미게 하는 작품이다. 화가는, 백범의 얼굴은 전통적인 초상화법으로, 몸은 먹의 필선만으로 묘사했다. 독립운동가가 지녔던 투철한 신념이 살아나도록 눈에 힘을 주고,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아 살짝 얽은 얼굴의 사실적인 느낌은 거친 종이로 나타냈다.

‘초상화 왕국’이었던 조선시대의 인물화 기법은 단지 그 얼굴 모양만 아니라 터럭 한 올까지도 놓치지 않는 겉모습의 핍진함과 정신세계까지를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중요시 했다. 전신사조를 가능하게 하는 기법이 배채법(背彩法). 화면 뒤에서 물감을 칠해 살색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면서 내면의 인품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라져버린 조선의 전통 초상화법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재해석한 화가가 바로 김호석이다.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 부자 나라가 되기보다 높은 문화의 힘을 지닌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소원했던 백범은 일찍이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문화의 힘이라는 것을 믿었다. 이 시대 우리가 이뤄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