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던 시대가 가고,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독자적인 발전을 계획하게 된 것은 큰 사회적 진보를 나타낸다. 서울이나 다른 중심부를 통과하지 않고, 세계에 그 나름의 설 자리를 얻는 것도 독자적인 발전의 한 표현이다.

국제적인 행사는 여기에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다. 영암의 F1 자동차경주대회나 목포 스포츠클라이밍세계대회와 같은 행사도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설계된 것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목포에서 열리는 행사와 관련하여 영국 BBC 인터넷 판에 목포 일대를 답사한 기사가 실렸다. 시설이나 풍광에 대한 칭찬이 있었지만, 가볼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유보를 담은 견해도 나와 있었다.

나는 광주비엔날레와 관련하여 외국에서 온 작가들로부터 같은 불평을 들은 일이 있다. 가볼 데가 없다는 것은 눈에 띠는 문화 유적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찾아 가볼만한 좋은 음식점이나 다방이 없다는 것, 걷고 싶은 거리가 없고 한적하게 쉴 수 있는 공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의 핵심에 들어 있는 것은 도시가 짜임새 있는 삶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도시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면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게 된다. 그것은 반드시 바둑판 모양의 길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유럽의 고도(古都)들에 가면 도시의 중심부에 광장이 있고, 광장의 주변에는 시청이나 시의회, 또는 길드 (상공업자 조합) 건물 또는 성당과 같은 것이 둘러 서 있다. 조금 뒷길로 식당이나 상점들이 요란하지 않게 이어진다.

건물들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도시의 사회적 정신적 생활의 구도를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역사적 경험의 흔적이면서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삶의 제도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설명을 들어서가 아니라 건축 양식이나 건축 자료 등에서 또 전체적으로 놓여 있는 공간의 모양에서 저절로 전달되어 온다.

사람의 지각은 산천이나 도시의 구도, 건물의 생김새, 그리고 그 배치에서 고장에 뿌리박은 삶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짐작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보다 선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주민보다 그 곳을 방문하는 이방인이지만, 거주민에게 그것은 마음 속 깊이에 잠겨 있는 귀속감과 삶의 안정감이 된다.

유럽의 고도에서 느끼는 삶의 터전의 유기적인 짜임새를 우리의 도시나 촌락에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불평할 수 있는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지금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변혁기이다. 정치나 사회의 조직, 사는 방식, 건축 모두가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이다.

많은 것에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 지은 많은 건물들은 지형에서 유리된 인공조형물일 뿐이다. 많은 지방에 지어진 휑뎅그렁하게 크기만한 시설물들은 계획한 사람들이 동네의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곧 알게 한다.

그 고장에 일이 있어 찾아온 사람을 주인이 손님으로 접대하던 곳이 옛 여관이다. 시골구석까지도 퍼져 있는 모텔들은 얼마나 다른가. 새로 생긴 소위 ‘무인텔’은 조각난 고장의 삶을 대표하는 건물이고 시설물이다.

사람들은 서로 보지도 않고 관계도 없이 지나쳐 갈 뿐이다. 지나쳐 가면서 돈만 던져 놓으면 된다. 우리의 도시에서 많은 것들은 이와 같이 지형이나 길거리나 삶의 유기적 질서에서 유리되어 완전히 따로 논다.

이것은, 되풀이하건대, 이 대전환기에 있어서 일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공중에 들떠 있는 거대한 구조물들을 토지에 내려앉게 하고, 우리가 사는 곳을 사람 사는 고장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거대 건축물과 종이 위의 계획이 아니라 삶의 빈자리를 채워 가는 것이 지금부터의 일이다. 그런 다음이면, 사람들은 우리의 도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를 발견하고, 볼 것이 없고 갈 데가 없다는 불평을 내놓지 않게 될 것이다.

〈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