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간 군사기밀협정이 조인 1시간 전에 극적으로 유보됐다. 개인간 비즈니스도 아니고 명색이 국가간 협정을 1시간 전에 보류하다니 참으로 ‘극적’이다. 정부 관계자들까지도 드라마를 너무 봐서 그런지 극적인 것을 무척 좋아한다. 뭔가 꼬인 문제를 풀 때도 그냥 타결은 없다. ‘극적’ 타결이 있을 뿐이다.

물론, 문제의 본질은 외교관례상 전례가 없는 1시간 전 유보도 문제지만,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를 국회 등을 통한 공론화 과정 없이 밀실에서 졸속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외교, 군사적 상황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번 한·일간 군사협정은 외형적으로는 한·일간의 문제, 특히 우리 국민의 대일 정서상의 문제로 비춰지지만 그렇게 단순한 구조만은 아니다.

한반도의 군사, 외교적 현실은 한·일이라든지, 한·중, 한·미식의 단선적 일차방정식의 차원을 벗어난 지 오래 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무튼 이번 헤프닝은 현 정부의 국정운영 난맥상을 극적으로 보여준 극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 주말에 벌어진 외교적 헤프닝을 보면서 필자는 우리에게 과연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진부한 주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의 일본을 보며 내일의 우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우선, 가볍게 접근해 보자. 사업에 조금이라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의 비즈니스 동향을 유심히 관찰한다. 5년 내지는 10년 후의 국내 동향을 예측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은 그 시차가 좁혀졌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일본의 커피 관련 시장을 지켜 보던 한 지인은 일찍이 한국에 커피 돌풍이 불거라고 예측했다. 국내 전문가들이 시장의 포화를 이야기할 때도 여전히 수요는 있다는 전망을 자신있게 내놓았다. 근거가 뭐냐 했더니, 일본을 보면 안다고 한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원조교제, 이지메, 황혼이혼, 소자화, 고독사, 버블 붕괴, 잃어버린 10년 등등. 일본의 독특한 사회 혹은 경제적 현상이라며 열심히 우리 언론들이 소개했던 말들이다. 이러한 말들은 한동안 세간의 술 안주감이었다.

이지메를 말하면서 일본 아이들의 왜곡된 집단성을, 황혼이혼을 말하면서 일본 여인네들의 인내심에 숨어있는 표독함을, 고독사를 말하면서 일본인들의 몰인정을 들먹였던 것이 엊그제 아니었던가. 90년대 초반의 버블 붕괴로 인한 부동산의 대폭락, 그리고 잃어버린 10년. 섬나라 일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해 왔던 현상들이 이제 우리들의 현실이 돼버렸다.

몇 년 전,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동료교수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료교수는 지역의 행정시스템을 연구하는 전국 규모의 연구모임을 주도했었는데,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웃 일본의 행정시스템에 관심이 생겨 일본어 스터디를 제안했다. 마침, 일본유학 경험이 있는 일본행정 전공 교수에게 일본어 지도를 부탁하자 그 교수로부터 일본어는 배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이유인즉, 한국의 행정, 교육 및 경제 정책 시스템 전반이 너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렇지 않아도 한국적 독창성이 빈약한 상황인데, 일본어까지 공부하게 되면 ‘번역 행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물론 다소 과장되고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정치를 제외한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일정한 시간적 격차를 두고 일본에 후행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도권 부동산의 폭락 또한 일본의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신봉하고 있는 ‘부동산 불패신화’의 원산지는 당연히 일본이다. 그 신화의 핵심 동력은 토쿄 일극중심주의 임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일본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현재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김규열 광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