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콘텐츠 그리고 예술
2012년 04월 23일(월) 00:00 가가
광주와 나주가 문화산업의 허브도시가 될 것인가. 이를 위해 많은 자본, 기술, 노력이 연일 쏟아 부어지고 있다. 이는 지역민을 위해 나아가 국민 모두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진화시키고, 물질적 풍요와 번영을 한번 제대로 누려보자는 욕망을 반영한다. 여기서 문화산업의 생명은 무엇보다 ‘콘텐츠’에 있다고 말해진다. 바야흐로 콘텐츠 산업의 시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콘텐츠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신자유주의 바람에 의해 예술의 영역이었던 콘텐츠는 서비스 경제로 편입됐고, 이제는 창조산업, 체험경제에 포섭됐다.
그렇다면 과연 콘텐츠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사로잡는 유무형의 요소를 지칭하며, 멋과 매력을 갖췄을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멋과 매력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감각, 기술이 조화를 이룰 때 나오지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감동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어야 살맛나는 것이다. 그것이 부족하면 물질이 충분해도 허전하고 마치 눈동자가 없는 눈과 같아서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생명력과 지속력이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콘텐츠가 정부 주도 하에 문화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전통적으로 예술의 영역이었던 것이 행정의 지도, 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목사업처럼 정부가 콘텐츠를 개발하겠다고 덤벼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시대의 역군이었던 산업 전사는 정부의 규율 하에 육성될 수 있을런지 몰라도 문화의 시대에 요청되는 예술전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문화산업 정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이고 끼가 넘치는 예술가들이 출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문화행정은 산업시대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라는 선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보화시대의 문화행정은 프로슈머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한 지원 체계를 바탕으로 작동돼야 한다. 이러한 지원 체계는 예술 전문가의 주도 아래 구축돼야 한다. 예를 들어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이하 문화전당)의 조성 방식에 있어서도 기술적인 하이테크 보다 예술적인 하이터치가 훨씬 중요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유배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흑산도를 무대로 만들어진 소설 ‘흑산’을 마치며, 작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 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한 소설가의 치열한 창조 과정에서 터져 나온 이 말에 가슴이 뭉클하다. 문화전당 사업의 첫번째 명제가 ‘문화콘텐츠의 창조적 발전소’라면 문화전당 사업의 전 과정이 김훈의 이러한 마음과 같이 이뤄질 수는 없는 것일까? 소위 ‘하위주체’인 아시아인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해 말을 하면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죽음의 유배를 당했던 정약전은 시대를 앞서 국가의 운명을 내다본 성리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는 흑산도의 흑(黑)이 너무 캄캄하다 여겨 자신의 호를 자산(玆山)이라 했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저 죽음의 땅에서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자는 또한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광주 5·18의 가치를 지금 여기의 시공간 좌표계에서 사상적으로 진화시켜야 하고, 의향의 예리한 기운을 예술적 감각으로 세련화 시킬 당위성을 안고 있다. 평등의 이념으로, 역사적으로 의기의 불길을 뿜어낸 무등산과 마주한 문화전당의 저 넓은 터가 어쩌면 장차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예술의 거대한 어두운 연못이라 여겨진다.
문화전당의 건물에 대한 시시비비로 2년간 공사가 지연됐는데, 거대한 건물을 지하로 내려 앉힌다는 건축가의 생태학적 구상은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광주 항쟁의 죽음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거부감을 유발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예술은 고통에서 품어져 나온다. 그곳에 희망이 있다. 옛 전남도청이 있던 부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아시아인의 고통, 슬픔, 소망의 거대한 예술적 수원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영철 아시아문화개발원장〉
그렇다면 과연 콘텐츠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사로잡는 유무형의 요소를 지칭하며, 멋과 매력을 갖췄을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멋과 매력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감각, 기술이 조화를 이룰 때 나오지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감동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엇이 있어야 살맛나는 것이다. 그것이 부족하면 물질이 충분해도 허전하고 마치 눈동자가 없는 눈과 같아서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생명력과 지속력이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콘텐츠가 정부 주도 하에 문화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전통적으로 예술의 영역이었던 것이 행정의 지도, 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목사업처럼 정부가 콘텐츠를 개발하겠다고 덤벼들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유배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흑산도를 무대로 만들어진 소설 ‘흑산’을 마치며, 작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 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한 소설가의 치열한 창조 과정에서 터져 나온 이 말에 가슴이 뭉클하다. 문화전당 사업의 첫번째 명제가 ‘문화콘텐츠의 창조적 발전소’라면 문화전당 사업의 전 과정이 김훈의 이러한 마음과 같이 이뤄질 수는 없는 것일까? 소위 ‘하위주체’인 아시아인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해 말을 하면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죽음의 유배를 당했던 정약전은 시대를 앞서 국가의 운명을 내다본 성리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는 흑산도의 흑(黑)이 너무 캄캄하다 여겨 자신의 호를 자산(玆山)이라 했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저 죽음의 땅에서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자는 또한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광주 5·18의 가치를 지금 여기의 시공간 좌표계에서 사상적으로 진화시켜야 하고, 의향의 예리한 기운을 예술적 감각으로 세련화 시킬 당위성을 안고 있다. 평등의 이념으로, 역사적으로 의기의 불길을 뿜어낸 무등산과 마주한 문화전당의 저 넓은 터가 어쩌면 장차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예술의 거대한 어두운 연못이라 여겨진다.
문화전당의 건물에 대한 시시비비로 2년간 공사가 지연됐는데, 거대한 건물을 지하로 내려 앉힌다는 건축가의 생태학적 구상은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광주 항쟁의 죽음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거부감을 유발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예술은 고통에서 품어져 나온다. 그곳에 희망이 있다. 옛 전남도청이 있던 부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아시아인의 고통, 슬픔, 소망의 거대한 예술적 수원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영철 아시아문화개발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