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호남은 전국 세곡(稅穀)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전국 최대의 식량 생산지로서 호남 없이는 국가 운영이 쉽지 않았다. 또 일제시대 목포항은 전국 3대 항구로서 식량 생산·운송의 거점이었으며, 국도 1호선(목포∼신의주)과 2호선(목포∼부산)의 기점이 일본과 가까운 부산을 제치고 목포로 설정된 것은 당시 호남의 위상을 나타낸 상징이었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호남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호남인은 경제력 저하, 정치·사회적 홀대 속에 살아오고 있다. 역대 정권마다 국정기조로 지역균형발전을 설정했던 것은 호남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40여년동안 추진된 지역균형발전정책이 그 실적이 미흡했음에도 최근 사회적 시류를 보면, 국민적 관심사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국민통합은 지역간 불균형, 계층간 빈부격차,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격차가 동시에 해소될 때 완성된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이다. 마침 계층간 격차는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1% : 99%’ 등의 복지논쟁으로 점화되고 있고, 기업간 격차는 동반성장위원회와 재벌개혁 등을 중심으로 이슈화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간 격차인 불균형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균형이나 낙후라는 용어는 잊혀지고 있다. 오는 12월 대선에서 지역간 격차는 이슈화되지 못해 공약으로 채택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호남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악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호남을 대표하고 선도하는 대권주자가 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당수 호남인들 조차도 언제부터인가 호남인이 나서지 않는 것이 정권 교체에 도움이 된다는 막연한 정치공학적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누구를 위한 정권 교체인지 묻고 싶다.

국민통합의 첫째 조건인 지역간 불균형으로 지역간 갈등이 심화되고, FTA 등 개방시대에 가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농어업이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세계 각국의 핵심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식량 위기시대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더라도 정권 교체를 위해 호남인이 대권주자로 나서면 안 된다는 정치공학적 논리를 고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

이러한 정치공학에 빠져든 사이 호남의 자존심을 짓밟고, 얕잡아 보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여권에서는 작년 영남지역의 최대 현안이었으나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취소되었던 동남권 신공항이 갑자기 호남까지 포함하는 남부권 신공항으로 재포장되어 등장했다.

수요 부족으로 인한 낮은 경제성을 보완하기 위해 호남까지 포함시킨 남부권 신공항을 대선공약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호남의 거점 공항인 무안국제공항은 안중에도 없는 발상이다. 호남에 유력한 대선주자만 있더라도 이렇게 무례한(?) 공약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호남에서는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남부권 신공항 문제에 대해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다.

또한 야권의 정치 쇄신을 명분으로 호남의 정치권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총선에 역량을 갖추고 지역민의 신뢰를 받는 인사가 출마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유독 호남만의 물갈이 폭이 큰 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호남만의 밀어붙이기식 물갈이는 호남을 희생양으로 삼아 호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역 문학가 송광용님은 호남인을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이라 일컬었다. 호남은 경제개발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어 왔지만, 의(義)·예(藝)·미(味)의 3향이라는 역사·문화적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삶을 이어 왔다.

더욱이 ‘지역의 팔자는 지역 스스로 고쳐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자구적인 지역발전전략의 추진 비중이 커져 가는 시점이다. 막연한 정치공학적 논리로 호남에서는 대권 주자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간 균형발전으로 국민통합을 촉진하고, 다가올 식량 위기시대 등의 대내외적인 여건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호남의 팔자를 스스로 고쳐나가기 위해 농도이자 소외의 땅 호남을 대표하는 대권 주자를 반드시 내세우자. 한 때나마 국가의 중추지역이었던 호남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에 이기고 고단한 삶을 이겨낸 사람들로 기록되자.

〈이건철 전남발전연구원 원장〉